[백록담]‘꽃길’만 걸었던 그들의 ‘블랙리스트’

[백록담]‘꽃길’만 걸었던 그들의 ‘블랙리스트’
  • 입력 : 2017. 02.06(월) 00:00
  • 이현숙 기자 hslee@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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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이제 '고3'이 되는 딸이 다니는 학교축제에 슬쩍 가봤다. 어찌 보면 학창시절 마지막 축제일 거라는 생각에 '딸의 간곡한 만류에도 감행한' 방문이었다. 생각보다 많은 학부모들이 무대를 지켜보고 있었다.

좋게 말하면 '자기 주도적', 나쁘게 말하면 '방치형'으로 육아를 해온 엄마는 학교방문이 영 어색했다. 그때쯤 축제 무대에서는 딸이 친구와 함께 부르는 '꽃길'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세상이란 게 제법 춥네요. 당신의 안에서 살던 때보다 모자람 없이 주신 사랑이 과분하다 느낄 때쯤 난 어른이 됐죠. 한 송이 꽃을 피우려 작은 두 눈에 얼마나 많은 비가 내렸을까. 돌이킬수록 더 미안. 포기해버린 젊고 아름다운 당신의 계절. 여길 봐 예쁘게 피었으니까. 바닥에 떨어지더라도 꽃길만 걷게 해줄게요."

조용히 가슴에 파고드는 가사를 들으면서 울컥했다. 이 아이들이 '꽃길'을 걸을 수 있도록 어른이라고 불리는 기성세대들은 이 나라를 온전히 만들어 주고 있는가.

얼마 전 '꽃길만 걷던'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구속됐다. 기사 제목은 '꽃길 걷던 김기춘·조윤선 눈맞으며 구속'이었다. 도대체 누가 이들에게 꽃길을 깔아줬던 걸까. 그리고 왜 '꽃길만 걷던' 이들이 타인을 향해 '블랙리스트'라는 칼을 꽂았던 것일까.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 혐의로 구속된 조윤선은 평소 문화를 사랑했던 정치인으로 통했다. 오페라를 즐기고, 미술 감상이 취미였다. 하지만 문화 발전에 기여하겠다던 그는 놀랍게도 문화계 탄압에 앞장서고 있었다. 우리 사회 상위 1% 집안을 배경으로 엘리트 코스로만 성장해온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균형 잡힌 사회를 위해 문화정치를 하겠다'고 했었지만 문화의 다양성을 강조하던 그는 불과 3년 뒤인 2014년 6월부터 문화예술계 편가르기 작업을 했던 셈이다.

박근혜 정부에서 '왕(王)실장' '기춘대원군'으로 불리며 막강한 권세를 떨쳤던 김기춘은 만 20세인 대학 3학년 때 고등고시 사법과에 최연소로 합격했다. 대검 특수1과장, 서울지검 공안부장을 거쳐 법무부 검찰국장 등 법무·검찰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노태우 정권 시절 검찰총장을 역임하고 이례적으로 법무부 장관까지 지냈다. 15~17대 신한국당과 한나라당 국회의원을 지내며 정치권에서도 승승장구했다. 그뿐인가. 정의롭지 못한 방법으로 '공안사건'을 만들었고 수많은 이들에게 아픔을 줬지만 꽃길을 깔고 '법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그가 걸었던 '잘못된 꽃길'이었다.

그들이 '꽃길'을 걷는 동안 우리 사회는 심각한 현실에 처했다. 사회적 부조리는 심각한 상황이다. 인구 고령화와 청년실업이 가중되면서 60대 취업자 수가 20대를 처음으로 앞질렀다. 취업난과 불안정한 고용환경에 안정적인 직장을 갖기를 원하는 공시생이 대학수학능력시험 응시인원보다 10만명이 많은 상황이다. 멀쩡하게 살던 사람도 우울증에 걸리게 하는 지금의 현실에서 '꽃길'만 걸어왔던 그들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촛불을 들기 위해 차가운 광장에 모이는 공시생, 수험생, 청소년들에게 '정의로운 꽃길'을 열어주는 것이 아닐까.

자신은 흙길을 걸어도 자식은 꽃길만 걷었으면 하는 부모들의 마음이 어떻게 다를까. 행복한 수학여행을 위해 꽃길을 만드는 심정으로 아이들을 세월호에 보냈을 부모들은 지금 '꽃길'이 아니라 '바닷속 길', 그것도 살아서가 아니라 별이 되어서 가는 아이들을 그리워하면서 살고 있다.

딸아이가 부르는 '꽃길'을 들으며 느끼는 이 먹먹함을, '꽃길'만 걸으면서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던 이들은 헤아릴 수 있을까. <이현숙 서귀포지사장·제2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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