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록담]'부종휴와 꼬마탐험대', 누가 이들을 기억할 것인가

[백록담]'부종휴와 꼬마탐험대', 누가 이들을 기억할 것인가
  • 입력 : 2015. 02.09(월) 00:00
  • 강시영 기자 sykang@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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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지붕으로, 밤 하늘의 별을 벗삼아 한라산 들판에서 홀로 날 밤을 샌 적이 하루 이틀이 아니다. 누구도 범접하지 못했던 미지의 지하 암흑 속 동굴을 헤집고 다녔다. 그래서 '기인'이라고들 했다. 코흘리개 어린 딸(부성자)을 '부한라'라 했고, 막내 아들(부지석)은 '부만장'이라 부르길 즐겨했다.

한산(漢山) 부종휴(1926~1980).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벌써 35년이 훌쩍 지났다. 몸둥이와 카메라에 의지해 제주 구석구석을 찾아 보물을 찾아낸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광복 이후 한라산과 식물, 동굴, 고고학, 산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며 뚜렷한 족적을 남긴 자랑스런 제주인이다. 한라산천연보호구역 설정, 국립공원 지정, 300여종의 미기록 식물 발견, 왕벚나무 자생지 발굴, 만장굴·빌레못굴 탐험 등은 제주 자연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훗날 세계자연유산, 생물권보전지역, 세계지질공원 등 유네스코 3관왕에 빛나는 제주 보물섬의 진가가 그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그는 진정으로 제주와 한라산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내가 부종휴 선생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초로 기억한다. 한라산대탐사의 취재팀으로 활동하면서 식물과 지질, 동굴전문가 등으로부터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시작한 것이 처음이다. 물론 그와는 일면식도 없다. 2004년 11월 한라산연구소와 한라일보사는 공동 주관으로 한라산과 부종휴라는 제목으로 학술심포지엄을 열었다. 당시 제주도는 부종휴 선생에 대한 기념사업을 약속했으나 여태 지켜지지 않고 있다.

그의 업적은 거의 기록으로 남겨지지 않았다. 때문에 그를 기억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족적은 지워지고 묻혀버리고 있다. 기념관은 커녕 그의 삶과 업적을 기리는 흉상이나 공적비 조차 찾아볼 수 없다. 그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점을 매우 안타까워한다. 특히 부종휴 선생의 유족들로서는 형언할 수 없는 비통한 심정이라는 것을 미루어 헤아릴 수 있다.

부종휴 기념사업은 공론화를 반복하면서 번번이 무산돼 왔다. 지난해에도 두차례 검토된 부종휴 선생의 업적발굴 용역이 예산 편성과 심사과정에서 제외됐다. 코흘리개 초등학생 어린 제자들을 이끌고 희미한 횃불과 짚신에 의지한 채 암흑속의 동굴을 헤집고 다녀 보물을 찾아냈지만 부종휴와 그를 따라나섰던 꼬마탐험대에 대한 기록은 과거속에 묻히고 이제는 아는 이 조차도 거의 없다. 30여명에 이르던 꼬마탐험대는 이제 몇분만이 생존해 계실 뿐이다. 앞으로 누가 이들을 기억하고 선양해 나갈 것인가.

며칠 전 제주도의회 홍경희 의원의 주도로 제주역사문화진흥원과 부종휴 선생 기념사업을 위한 심포지엄이 다시 열렸다. 이 자리에서 원희룡 지사와 구성지 도의회 의장, 이석문 교육감은 한 목소리로 부 선생의 기념사업에 대한 지원과 관심을 약속했다. 부종휴 선생의 기념사업을 위해서는 체계화된 조사와 기념사업회가 필요하다. 제주도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한라산과 동굴 박사, 부종휴'의 육신은 갔지만 그의 정신과 열정은 한라산과 제주 구석구석에 남아 여전히 살아숨쉬고 있다. 부종휴와 꼬마탐험대의 기록은 이어져야 한다. 그것은 우리들의 몫이어야 한다. <강시영 편집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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