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觀] 구원자
내 등잔 밑의 기적
  • 입력 : 2025. 11.10(월) 02:00  수정 : 2025. 11. 10(월) 08:13
  • 김미림 기자 kimmirimm@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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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구원자'

[한라일보] 어떤 단어들은 결코 손에 잡히지 않지만 생의 순간 내내 간절히 바라게 된다. 그 단어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대체로 구체적이고 생생한 누군가의 경험담이 필요한데 그것은 그 단어들이 분명 삶의 순간 속에 존재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구원과 은인 역시 그런 단어들이다. 너무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분명한 어떤 사례들로 인해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유효하게 존재하는.

최근 극장가에 개봉한 두 편의 영화의 제목은 각각 <구원자>와 <생명의 은인>이다. 이 작품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구원과 은인은 무엇일까, 이 단어들은 어떤 삶 속에서 길어 올려진 것일까.

성장물 <용순>으로 인상적인 장편 데뷔를 했던 신준 감독의 신작 <구원자>는 미스터리 오컬트 장르를 표방한 작품이다. 교통 사고로 인해 시력을 잃은 아내 선희(송지효)와 걷지 못하게 된 아들 종훈(진유찬)을 둔 가장 영범(김병철)은 축복의 땅이라고 불리우는 오복리로 이사를 결심한다. 영범은 그곳에서 우연한 사고로 만나게 된 병 든 노인(김설진)을 집에 들인 뒤 무슨 영문이지 모르지만 아들 종훈이 다시 걷게 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 정황상 이 노인은 기적을 가져다 주는 존재로 느껴지고 아내 선희 또한 그를 통해 잃어버린 시력을 되찾을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된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영범 가족에게 축복처럼 내려진 이 기적은 같은 마을에 사는 춘서(김희어라)와 그의 아들에게는 저주에 가까운 불행의 얼굴로 나타난다.

기적과 저주, 축복과 불행이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표정을 바꾸는 영화 <구원자>는 간절한 인간의 욕망이 어떤 형태로 빚어지고 무너지는 지를 차분하게 관찰하는 작품이다. 종교를 통해서도 구할 수 없는, 간절한 기도만으로는 구체적인 결과를 받아낼 수 없는 불가능에 가까운 소원들을 이룰 수 있다면 당신은 무엇까지를 포기할 수 있는가, 나의 전부를 바쳐 내가 사랑하는 이를 불행 이전으로 되돌릴 수 있다면 흔쾌히 수락하겠는가.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사랑이 깊다면 고개를 끄덕일 질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 불행을 끌어 안아야 하는 이가 내가 아닌 무관한 타인이라면 당신은 눈 감을 수 있는지, 나의 행을 타인의 불행과 맞바꾸는 것을 동의할 수 있는지 <구원자>는 어려운 질문을 건네는 영화다. 나의 노력으로 인해 신이 내려주는 개별의 축복이 아니라 타인의 불행을 통해서야 획득할 수 있는 등가교환의 구원에 대해 우리는 어떤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이 잔혹한 제로섬 게임에 동의할 수 있는가.

방미리 감독의 장편 데뷔작 <생명의 은인>은 열 아홉 세정(김푸름)이 맞닥뜨린 '생명의 은인'과의 뜻밖의 재회를 담고 있다. 만18세가 되어 보호 종료 아동인 동시에 자립 준비 청년이 되어버린 세정은 자립지원금 500만원으로 보육원을 나와 세상에서 홀로 설 준비를 하고 있던 차에 은숙(송선미)의 갑작스러운 방문과 맞닥뜨리게 된다. 어린 시절 세정의 목숨을 구했다고 주장하는 은숙은 자신은 현재 시한부이니 수술비 500만원을 빌려 달라고 세정에게 청한다. 능청스러운 사기꾼 같지만 한편으로는 세상에 홀로 나온 자신에게 필요한 곁을 내어주는 은숙에게 세정은 어쩐지 마음이 간다. 세상에 나 이외에도 온전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할까. 누군가의 삶을 구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생명의 은인>은 외로운 두 사람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 삶의 구원에 대해 묻는다. '누가 누구를 어떻게 살릴 수 있을까?'.

<구원자>와 <생명의 은인>이 각각 건네는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의 끝에는 결코 희미해지지 않을 지극한 사랑의 표식들이 있다. 서로를 지키기 위해 어떤 상황에서도 곁을 떠나지 않은 <구원자>의 가족들이 새긴 시간의 주름들, 긴 세월 간직한 기억의 힘으로 현재의 사랑을 다시금 타오르게 만드는 <생명의 은인>속 관계라는 불씨들이 그 끝내 선명해지는 표식들이다. 쉬이 믿기지 않겠지만 구원도 은인도 어둑해 보이기만 하는 등잔 밑에 놓여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어떤 단어들의 주석은 각자의 삶으로만 달 수 있다는 것, 그것은 기쁘게도 우리 모두가 영원히 재생될 생의 기적을 만들어 낼 주체라는 이야기가 아닐까.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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