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觀] 3670
반짝이는 회전목마
  • 입력 : 2025. 09.01(월) 02:00
  • 고성현 기자 kss0817@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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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3670'

[한라일보] 영화가 생명체라고 느낄 때가 종종 있다. 어떤 영화는 보는 내내 동경하게 된다. 손에 쥐어지지 않을 것 같아서, 멀찌감치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한 영화들 그런 영화를 만나고 왔을 때는 다시 가기 힘들 먼 나라로 여행을 다녀온 것 같다. 어떤 영화는 시작한 지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사랑에 빠지게 만든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떨림이 극장 의자에 편안히 기대 있던 몸과 마음을 뒤흔든다. 매혹이라는 감정이 감상 전체를 휘젓고 약간의 마비와 잠깐의 발작도 느끼게 된다.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이런 영화는 두 번 다시 보지 않으려고 덮어두는 경우가 많다. 사랑에 가까웠던 그 순도를 간직하고 싶어서다. 또 다른 경우는 <3670>같은 영화의 경우다. 어쩐지 친구가 될 것 같은 영화. 그 속을 알 것 같고 나를 알아줄 것 같은 영화. 오해를 반복해도 결국은 이해하고 싶은 영화. 슬플 때 찾아가서 나를 털어놓고 싶고 슬픔으로 다가오면 툭툭 그 등을 두들겨 주고 싶은 영화. 종종 안부를 묻고 싶고 멀리서라도 응원을 전하고 싶은 그런 영화를 나는 친구 같은 영화로 곁에 둔다.

박준호 감독의 장편 데뷔작 <3670>은 '종로3가 6번 출구 앞 7시에 만날 사람의 숫자'를 뜻한다. 집단의 은어인 동시에 약속의 숫자다. 영화 <3670>은 성소수자인 게이인 동시에 탈북자로서 이방인의 정체성을 가진 중첩된 소수자 철준(조유현)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소속감은 때론 누군가를 무척이나 위축되게 만드는 감정이다. 철준은 다양한 방향에서 이 감정과 직면한다. 영화의 초반부 누군가와의 섹스를 마친 철준은 수줍은 듯한 북한 말투로 상대에게 애프터를 청하지만 다소 매몰차게 거절 당한다. 누가 들어도 서울 깍쟁이 같은 상대의 새침함이 서릿발 같다. 철준이 가진 장점과 한계가 명징하게 제시되는 장면이다. 단련된 육체의 성적 매력을 지닌 게이인 철준은 은밀한 관계에서는 충분히 선택 받을 수 있는 이다. 하지만 그가 가진 또 다른 소수성은 관계에서 그 이상을 어렵게 만든다. 아직 커밍아웃을 하지 못한 탈북민 커뮤니티는 철준을 다른 의미로 외롭게 하는 곳이다. 이 순하고 단단한 청년은 그렇게 남한의 북한 게이로 외로운 섬이 되어간다. 어디에도 있지만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채로. 그런 철준이 동갑내기 영준(김현목)을 만나게 된다. 밝고 쾌활한 영준 덕에 철준은 아직은 어색하기만 한 남한의 게이 커뮤니티에 성큼 발을 들인다. 그 세계는 철준을 반기는 것만 같다. 이제 철준은 낯선 파도에 젖는 일이 유쾌한 놀이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되고 파도를 타고 싶다는 욕망 또한 열리는 마음 안에서 성큼 자라난다.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철준을 생생하게 만든다. 기지개를 켜는 그의 모습을 보는 일은 흐뭇하다.

<3670>안에는 많은 감정과 관계들이 혼재되어 반짝인다. 외로움과 사랑이, 쓸쓸함과 우정이, 동경과 연대가 뒤엉킨 채 흘러가는 청춘의 모양들이 네온 사인처럼 형형하다. 퀴어 영화라는 장르적 특성과 이방인이라는 캐릭터의 특수성을 세심하게 살펴 보면서도 영화는 보편적인 감수성의 촉수로 더 넓은 범주를 건드린다. <3670>은 관계에서의 계급이라는 희미한 선을 모른 체 하지 않으며 소속감이라는 예민한 줄에 걸린 이들의 어찌할 수 없는 흔들림을 피하지 않고 마주본다. 철준의 결핍과 영준의 결핍이 교차되며 보여질 때 관객들은 스스로의 결핍 또한 그들 곁으로 꺼내 놓게 된다. 혼자의 결핍을 채우는 것은 어느 관계어서나 그렇듯 나의 용기와 타인의 응원임을 <3670>은 잘 알고 있는 영화다. 영웅도 악당도 없는 이 영화는 마치 외로운 마음들이 만나는 정거장 같다. 영화 포스터의 카피인 '우리 모두 행복하려고 여기 온 거 아니겠니?'라는 문장처럼 철준과 영준을 포함한 영화 속 인물들은 그들의 세상 안에서 서로의 외로움을 알아가며 나와 타인의 결핍을 채워 넣을 소중한 시간들을 만들어 가는, 우리를 선택한 행복할 자격을 갖춘 이들이다. 그 시간들을 영화는 귀하게 다룬다. 누구 하나 소외 되지 않도록 , 어떤 존재도 부정 당하지 않도록 애정으로 빚어낸 캐릭터들이 펄떡이는 생동감으로 약동한다. 어느 순간 가까워져 친구가 되었던 타인과 갑작스레 멀어졌지만 여전히 친구가 아닐 리 없을 누군가를 동시에 생각하며 올해의 엔딩이라고 생각하는 철준의 노래를 따라 불러본다. 빙빙 돌아가는 회전목마처럼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그렇게 믿는 것만으로도 지속되는 우정이 분명히 있다고 끄덕이며.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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