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발을 내딛는다. 방향이 확실하지는 않은데 등 뒤에서 떠밀리는 힘이 생각보다 강하다. 움찔하며 몸이 휘청이는 것 같지만 이내 중심을 잡아본다. '나는 이제 어른이니까. 어른이란 것을 배워가야 하니까' 라고 생각하면서. 걷는 내내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다. 뿌연 안개 같은 것이 내내 끼어 있는 것 같다. 빛이 들어오면 안개가 걷힐 텐데 라고 생각하면서 좀 더 가본다. 불안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이동이 지속될 때 내 곁에 누군가 나와 함께 걷고 있음을 알게 된다. 슬쩍 어깨가 닿기도 하고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 지기도 하면서.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닌 것 같아서 두려움이 조금 사라진다. 우리 앞의 안개는 여전하다. 빛을 기다리며 숨을 고른다. 어른은 이미 시작된 것일까. 조금 더 미래에 가까워지고 있는 중인가.
<휴가>를 연출한 바 있는 이란희 감독의 신작 <3학년 2학기>는 열 아홉 학창 시절의 후반전을 학교가 아닌 낯선 공장에서 치르게 된 창우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특성화고에 재학 중인 창우는 여러 조건이 꽤 괜찮다고 느껴지는 중소기업의 현장 실습생이 되기로 마음 먹고 등교가 아닌 출근길에 오른다. 잘 하면 대학도 갈 수 있고 어쩌면 병역 특례의 혜택도 누릴 수 있기에. 창우와 함께 같은 공장으로 출근을 시작했던 학교 단짝인 우재는 출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회 생활을 일찍 접기로 하고 회사를 박차고 나간다. 창우는 이제 낯선 공장에 홀로 남아 일과 사회를 겪어 나가게 된다. 거기에는 창우와 동갑이지만 먼저 일을 시작한 다혜와 성민이 있고 여러모로 서툰 창우가 보기에 둘은 어쩐지 선배의 묵직함이 있는 것 같다. 고된 일과의 끝에는 두 명의 동생과 엄마가 함께 살고 있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 출발했던 그곳에서 창우는 스스로 번 돈으로 가족들에게 치킨을 선물하고 자신의 방 안에서는 홀로 기타를 연주한다. 영화는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겪어 나가는 창우의 일상을 따라간다. 쉽사리 불평하지 않고 작은 불만들은 종종 삼키며 가까운 만족과 먼 미래에 의지한 채로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창우의 성실한 몸짓이 영화의 곳곳을 채운다.
포털 사이트에 검색창에 '3학년 2학기'를 입력하면 자동 검색어로 따라 붙는 단어들은 '내신, 출결, 수학, 수행평가'등이다. 많은 이들에게 그 시기는 대학 입시의 어두운 전야로 굳어진 지 오래다. 그런데 모두가 대학에 가지 않는다는 당연한 명제는 데이터 속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3학년 2학기>는 데이터 속에서 유의미한 수치로 존재하지 않는 이들의 삶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귀한 극영화다. 살아 숨 쉰다는 표현이 적합할 캐릭터들과 그 캐릭터들을 맞춤옷처럼 입은 배우들의 앙상블은 놀랍다. 잠깐 스쳐 지나가는 역할이었고 분명 낯선 배우의 얼굴이었는데 영화를 본 지 한참이 흘러도 그 장면의 그 표정이 또렷하게 기억날 정도로. <3학년 2학기>는 이렇듯 전작 <휴가>를 통해서 매력적인 캐릭터를 통해 지금 우리 삶의 구석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이란희 감독 특유의 노련한 보법이 더욱 풍성해진 작품이다. 또한 노동 영화라는 일상적 장르가 얼마만큼 다양한 장르로 확장되며 극적 재미를 전해줄 수 있는지를 훌륭한 완성도로 입증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타인과 관계를 맺는 순간들을 예리하게 포착하는 청춘 영화이며 지금 한국 노동 현실의 사각지대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공포 영화인 동시에 뭉클한 가족 영화로도 자연스레 확장된다.
무엇보다 <3학년 2학기>는 모두가 함께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성장 영화다. 나는 이 작품을 퇴근 후에 관람했는데 노동의 끝에 본 영화의 이야기가 마음 속 깊이 파고 들었다. 여전히 사회 생활은 어렵고 노동의 무게는 가볍지 않으며 삶의 방향과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이 줄어들지 않는 시기. 사는 내내 여러 번 마주쳐야 할 선택의 순간들 앞에서 나는 어떤 태도로 어른이 되어야 할까라는 질문의 답을 영화 속 인물들로부터 들었다. 영화 속에는 용접을 설명하며 '용접은 불꽃으로 풀칠하는 거야'라는 대사가 있다. 불꽃으로 풀칠하기. 식지 않는 마음으로 이어 붙여 단단하게 만들기. 세대와 세대를, 희망과 절망을, 과거와 미래를, 너와 나를 그렇게 붙이는 마음. <3학년 2학기>는 정말이지 불꽃으로 풀칠하는 영화다. 성실하고 근사하게, 재미있고 단단하게.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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