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사람 이방익 표류현장을 가다Ⅱ] (3) 엄자릉 조대

[제주사람 이방익 표류현장을 가다Ⅱ] (3) 엄자릉 조대
부·명예 흔들리지 않았던 엄자릉… 산처럼 높고 물처럼 길다
  • 입력 : 2019. 07.30(화)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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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하령 지나 열흘만에 도착
부춘강 엄자릉 낚시터 고적
후대에 영향끼친 은자의 삶
'산고수장' 등 글귀에 생생


'칠리탄(七里灘) 긴 구뷔에 조대(釣臺)가 놉핫스니/ 한광무(漢光武)의 고인풍채(故人風采) 의연(依然)이 보압는 듯'. 1914년 '청춘' 창간호에 실렸던 이방익의 기행가사 '표해가'는 어느덧 '엄자릉(嚴子陵)의 옛터'를 노래하고 있다. '칠리탄 긴 구비에 조대가 높았으니/ 한나라 광무제의 옛 사람 풍채 의연히 보이는 듯 하구나'로 풀어쓸 수 있는 구절이다.

엄자릉 조대 유적지로 향하는 길에 유람선이 그림처럼 떠있다

엄광(嚴光)이란 또다른 이름을 가진 엄자릉은 동한의 은자(隱者)였다. 같이 공부하며 지냈던 한나라 광무제가 황제가 된 후에 이름을 바꾸고 숨어 살았다. 광무제가 엄자릉을 찾아내 조정으로 불렀으나 오지 않다가 세 번을 청한 뒤 겨우 나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광무제는 엄자릉이 오래도록 조정에 머물러 있기를 권했지만 그러질 않았다. 엄자릉은 부춘산(富春山)으로 들어가 엄릉뢰(嚴陵瀨, 또는 칠리뢰, 칠리탄)라는 물가에서 낚시를 하며 생애를 보냈다.

이방익 일행은 선하령을 넘은 지 열흘이 흐른 4월 초5일 엄자릉 조대에 다다른다. 표류민으로 낯선 땅에 당도해 머나먼 길을 돌아 고향으로 향하던 이방익은 이곳에서 잠시 숨을 돌렸던 것일까. 중국의 묵객들이 흠모하던 곳에 들른 이방익은 기행가사로 그 감흥을 남겼고 순한글 '표해록'에도 여정을 적어놓았다.

"이 땅은 엄자릉이 머물던 곳이다. 남으로 칠리탄이 있고 칠리탄 위쪽으로 조대가 있고 작은 비각이 희미하게 보이며 단청한 정자가 있다. 여기는 엄자릉이 조대 위에서 낚시질하고 정자에서 놀던 곳이다. 훗날 사람들이 그의 행적을 기록하여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이다."

배를 타고 내린 길, 엄자릉 조대 유적지를 알리는 건축물이 방문객을 맞았다

절강성 항주 가는 길에 엄자릉 조대 관광안내소에 들렀다. 제주사람 이방익의 발자취를 좇아 다시 그곳에 선 탐방단은 이방익 '표해록'이 지닌 현장성에 다시 한번 놀랐다.

더러 그의 서술은 사실과 다르거나 순서가 바뀌기도 하고 판단을 유보해야 될 때도 있지만 이번처럼 들어맞는 일이 많았다. 이방익이 전해준 기록처럼 엄자릉과 인연이 있는 장소로 칠리탄 위쪽에 조대가 있었다.

엄자릉 조대가 그림에 등장하는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는 이 일대의 빼어났던 풍광을 짐작하게 만든다. 원(元)의 화가인 황공망(黃公望)이 1347년에 그리기 시작해 나이 81세 되던 해인 1350년에 완성했다는 부춘산거도는 절강성 부춘강(富春江)을 배경으로 한 길이 7m의 두루마리 산수화다. 가을로 접어든 부춘강변을 겹겹이 둘러싼 산봉우리, 울창한 소나무와 기암괴석, 구름과 안개에 덮인 농가의 아름다운 정경 등 강남의 산수를 담아낸 중국 고대 수묵화의 최고봉으로 평가받는다.

연암의 '서이방익사'에 등장하는 십구천

이방익처럼 지난 봄날 찾은 엄자릉 조대는 과거의 그 모습 그대로는 아니었지만 오늘날도 중국인들이 여유로이 노니는 관광지였다. 배를 타고 강을 가로질러 닿은 장소에 '엄자릉조대'라고 적힌 대문 모양의 중국 고유 건축물(패방)이 방문객들을 맞았다. 섬처럼 조성된 그곳에 세워진 엄자릉비와 동상들이 유구한 세월을 말해줬다.

입신 출세를 뒤로 하고 낚싯대 하나에 의지해 은거한 그의 삶은 이백(李白), 범중암(範仲淹), 맹호연(孟浩然), 소식(蘇軾), 육유(陸遊) 등에게 영향을 미쳤다. 남북조(南北朝)부터 청나라 시기까지 1000여명의 시인이자릉조대를 방문했고 2000여편의 시 작품을 창작했을 정도다. 부귀나 명예에 흔들리지 않았던 엄자릉의 모습에 반했던 범중암은 '구름 낀 산은 푸르고 강물은 끝없고 선생의 풍모는 산처럼 높고 물처럼 길다(雲山蒼蒼 江水앙앙, 先生之風, 山高水長)'고 썼다. 엄자릉 조대 유적지를 빠져 나오는 길, 중국서예협회 부주석을 지낸 사맹해(沙孟海)의 글씨로 적힌 '산고수장'이 눈에 닿았다.



현장을 기록한 이방익
문헌으로 확인한 연암


이방익이 발로 디뎌 확인한 현장을 기록으로 남겼다면 '서이방익사(書李邦翼事)'를 쓴 연암 박지원은 문헌을 통해 실제에 접근하려 했다. 때때로 그 둘이 그려낸 정황은 같거나 다르다. 엄자릉 조대는 이방익, 박지원 모두 실상과 가깝게 표현됐다.

엄자릉 조대를 빠져나오는 길, 엄자릉의 풍모를 담은 '산고수장'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연암은 지금의 대만 팽호도에 표착한 뒤 중국을 거쳐 무사히 살아돌아온 이방익이 구술한 엄자릉 조대를 두고 "엄광(엄자릉)이 은거한 곳"이라고 운을 뗐다. 곧이어 "두 벼랑이 깎아지른 듯이 서서 검주와 무주에서 흘러온 물을 끼고 동려(桐廬)현으로 내려가는데 꾸불꾸불 헤엄치는 용의 형세로 7리를 뻗쳐 있습니다. 물이 불어나면 물살이 부딪치는 것이 화살과 같고 산허리에 큰 바윗돌 두 개가 우뚝하니 마주 서서 기울어 떨어질 듯하므로 조대라고 이름한 것이니 이는 천연적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라고 마치 눈앞에서 목격한 듯 적어놓았다.

연암은 이 대목에서 이방익의 기록에는 없는 '십구천(十九泉)'을 소개했다. 엄자릉 조대에 얽힌 '서이방익사'의 구절을 마저 옮기면 이렇다. "호사자(好事者)가 그 위에 정자를 짓고 왼편에는 백 척(尺)의 낚싯줄을 드리우고 오른편에는 아주 작은 솥 하나를 남겨 두었습니다. 대(臺)에 올라가 내려다보면 깊은 못은 물빛이 녹옥(綠玉 에메랄드)처럼 검푸른 빛을 띠고 있고 산기슭에는 온갖 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이 뻗어 있으며 아래에는 십구천이 있는데 육우(陸羽)의 품평을 거친 샘입니다."

이방익과 연암의 기록은 같이 비교해 읽으면 한층 흥미롭다. '표해록'을 통해 이방익이 직접 자릉조대를 거쳐갔다는 걸 알 수 있다면 연암은 가보지 않았는데도 '십구천'처럼 문헌으로 이를 확인했다. 하지만 남은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이방익과 연암의 기록이 충돌하는 양상도 드러난다. 누구는 맞고, 누구는 틀리다. 진선희기자

▶ 자문위원=권무일(소설가) 심규호(제주국제대 석좌교수)

▶ 글·사진=진선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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