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 작가의 시(詩)로 읽는 4·3] (17)경인(庚寅)-1950(김경종)

[김관후 작가의 시(詩)로 읽는 4·3] (17)경인(庚寅)-1950(김경종)
  • 입력 : 2019. 07.18(목)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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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河万變水東流(산천 만 번 변하여도 물 동으로 흐르나니)

白首呼兒泣古洲(옛 물가에 눈물 떨구며 아들 찾는 백발이여)

節義當年忠死地(절의는 이 해 맞아 충성스레 죽어가고)

兵戈此日灰樓(전쟁이 겁나고나 이날 누대 재 되었네)

神明識焦心恨(신명이 행여 타는 한스러운 맘을 알까)

世亂空添觸目愁(세상의 어지러움에 괜스레 더해진 근심)

骨肉不知烏有在(아들이 어디 있는지 아아 알지 못 하겠네)

惟魂遙向故園遊(혼 되어 노닐었던 옛 동산을 향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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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섬에 불어 닥친 비극을 맨 먼저 드러낸 것은 문학이다. 4·3문학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던 그들은 죽어서 공산주의자가 되었다'는 언어를 발견하는 일이다. 민중의 기억은 대학살에 대한 기억이다. "본도의 4·3사건에 아들 창령이 뜻밖의 환난을 당해 진주에 붙들려 갔는데 때마침 적병이 들이닥쳐 생사를 알지 못했다. 한 번 가서 탐문해 보았지만 이미 죽은 뒤였다. 다시 촉석루를 찾아보니 또한 재가 되어버렸다. 드디어 그 원운을 취하여 비참한 감회를 적어본다."(本道四三之變家兒昌玲以橫厄拘在晉州適遭敵兵入城生死不知一往探問事已逝矣又見矗石樓亦灰矣遂取其原韻以敍悲懷)는'경인(庚寅)-1950'의 원래 제목이다. 과거 북제주문화원에서 발간한 석우(石友) 김경종(金景鍾, 1888~1962)의 '백수여음(白首餘音)'의 번역은 이미 탁월한 실력을 인정받는 백규상(白圭尙)이 수고하였다.

석우는 일제강점기 시절 그 자취를 드러내지 않고 은일(隱逸)하다가 해방을 맞이하여 뛰어난 시재(詩才)를 드러낸 우리고장의 정통유학자이다. 모두 2권으로, 시(詩)와 문(文)을 각 권에 따로 모아 연대별로 기록하였다. 저자는 노형동에서 태어나 영주음사(瀛洲吟社)의 사장을 지내며 사문(斯文)이 쇠퇴해진 가운데 유림을 규합하는 데 힘쓴 인물이다. 영주음사는 1924년 봄 도내 문인 123명이 모여 설리한 문인단체였다. 석우는 전라북도 계화도(界火島)에 건너가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로부터 여러 해 가르침을 받았다. 특히 석우는 당대 제주의 유림인 심재(心齋) 김석익(金錫翼), 행은(杏隱) 김균배(金勻培) 등과 교유하며 칠성로에서 한약방을 운영해 생계를 해결하면서 시 짓기를 즐겼다. 1947년 3월 1일로부터 1948년 4월 3일을 거쳐 1954년까지 4·3사건과 관련하여 사법부의 재판을 받고 형을 언도받은 사람들은 수천 명에 달하였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벌금형·구류·집행유예 등을 언도 받았지만, 금고·징역 등의 실형을 언도 받은 사람들은 전국 각지 형무소에 분산 수감되었다. 이들 형무소 재소자들은 형기를 채우고 출소하기도 하였지만, 열악한 형무소 수감 환경 때문에 옥사하기도 하였고, 상당수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불순분자를 처분하라는 상부 명령에 따라 총살당하였다. 석우의 아들 김창진(金昌珍)의 경우 김천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했다. '백수여음'에는 1949년에 이승만 대통령에게 당시 4·3의 진상에 대해, 보고 들은 것을 적어 보낸 장문의 편지글 '여이승만서 기축(與李承晩書 己丑(1949)'과 나중에 쓴 성토문 '이승만성토문 경인(李承晩聲討文 庚寅(1950)'은 육지형무소에 수감됐던 4·3 연루자들의 무고한 학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이승만의 만행과 죄상을 폭로한 글이다.

<김관후 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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