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오빠"… 제주4·3 유해 70년 만에 가족 품

"우리 오빠"… 제주4·3 유해 70년 만에 가족 품
22일 '유해발굴 신원확인 보고회' 진행
유골함 행사장에 나타나자 통곡소리 가득
형제가 확인됐지만 누가 형인지 모르기도
  • 입력 : 2018. 11.22(목) 16:44
  • 송은범기자 seb1119@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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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제주4·3평화교육센터에서 '4·3희생자 유해발굴 신원확인 보고회'를 개최된 가운데 70년 만에 가족을 찾은 유족이 유골함을 끌어 안고 오열하고 있다. 송은범기자

유족회 "정부 지원·추가 발굴 진행" 촉구

교사로 재직 중 1949년 봄 출근길에 체포돼 같은해 6월 28일 이후 행방불명 - 故 문기호(1925년생) 애월 고성리

토벌대가 가옥을 방화하자 산으로 피신했다가 토벌대에 체포돼 1949년 10월 2일 이후 행방불명 - 故 오국양(1928년생) 표선 가시리

봉개국민학교 교사로 재직 중 토벌대에 연행돼 1949년 10월 2일 이후 행방불명 - 故 고의학(1920년생) 제주 영평리

 제주4·3 당시 실종돼 생사를 알 수 없었던 29명의 유해가 70년 만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제주4·3희생자유족회 회원들이 유골함을 들고 보고회장으로 들어가려는 모습. 송은범기자

제주4·3평화재단은 22일 제주4·3평화교육센터에서 '4·3희생자 유해발굴 신원확인 보고회'를 개최했다. 이번에 신원이 확인돼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유해는 지난 2006년부터 2011년까지 제주국제공항 등지에서 발굴된 것이다.

 유해 29구는 4·3 당시 군법회의 사형수 22명, 예비검속 희생자 6명, 기타 1명으로 확인됐으며, 가족 관계는 부-자녀 9명, 형제자매 17명, 삼촌-조카 3명이다.

 이날 유족들은 70년 만에 돌아온 가족의 유골이 상봉장으로 들어서자 하염없는 눈물을 쏟아냈다. 직접 유골함에 이름표를 붙여주는 순간에는 유족 뿐만 아니라 다른 참가자들까지 오열하면서 장내는 통곡소리로 가득 찼다.

 

4·3 당시 오빠를 잃었던 양유길 할머니가 오빠의 유골함을 봉안관에 모신 뒤 오열하고 있다. 송은범기자

1949년 10월 2일 오빠 故 김태형씨를 잃은 김태일(87) 할머니는 "제대로 걸을 수 없었지만 그리운 오빠를 보기 위해 남원읍 의귀리에서 찾아왔다"며 "이제라도 오빠를 모실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다시금 4·3의 기억이 살아나는 것 같아 억울하고 원통한 마음도 든다"고 말했다.

 형제가 동시에 신원 확인이 됐지만 유전자감식의 한계로 누가 형이고 동생인지 확인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허남○(1922년)·허남◇(1923년생) 형제가 그 주인공이다. 가족들은 몸이 불편해 이날 행사에 참석하지 못해 4·3유족회가 대신 이들을 봉안관으로 운구했다.

 

유골함에는 유족의 손에 의해 이름표가 붙여졌다. 송은범기자

오임종 제주4·3희생자유족회장 직무대행은 "허씨 형제의 비극을 보면서 잘못된 국가폭력의 참상을 느낄 수 있었다"며 "이러한 공권력에 억울하게 희생된 도민들이 예산 때문에 수 십년 동안 가족 품에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반문하며 정부 지원을 촉구했다.

 김상호 유족대표 역시 "7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가슴에 묻었뒀던 아버지의 유해를 마주하니 마치 꿈을 꾸는 것 같다"면서도 "아직도 신원확인이 안된 유해가 많기 때문에 이번 계기로 좀 더 많은 확인과 추가 발굴이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2006년부터 2011년까지 제주국제공항 등지에서 발굴된 400구의 유해 중 이번 29구를 포함해 총 121구가 유전자 감식을 통해 신원이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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