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아흔여덟의 봄, 창가에 앉은 어머니는 문득 하루가 길게 느껴진다. 예전에는 해야 할 일이 많아 시간이 늘 부족했는데, 이제는 시간이 남는다며. 어머니는 그 남는 시간 속에서 '오늘은 누가 올까'를 생각하시지만 자식들은 각자의 삶을 살아가며 바쁘고 책임이 많기에 '와라'는 말을 삼키고 기다리는 쪽을 선택하신다. 괜히 말을 꺼냈다가 부담을 줄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어머니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말씀하셨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를 기다렸고, 어른이 되어서는 자식을 키우며 살다가, 이제는 자식의 안부를 기다리며 살아간다고. 노인이 되어보니 '사람은 기다리는 존재'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고 하셨다.
'말하지 않는 것이 배려다', '기다리는 것이 관계를 지키는 방법이다'라는 믿음은 어머니를 조용하고 단정하게 만들었지만, 그 안에는 깊은 쓸쓸함도 함께 쌓여가고 있었다.
그때 딸인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엄마, 보고 싶다고 먼저 말해보면 어때요?"
낯설고 쉽지 않은 제안이었지만, 그날 오후 어머니는 아들에게 전화를 거셨다.
"별일 없냐."
짧은 말이었지만 사실은 '보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전화를 받은 아들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한다. 늘 '나중에 가야지'라고 미뤄왔던 마음이 그날은 유난히 걸려 결국 미루던 마음을 접고 '오늘 가야겠다'고 결심한다.
문을 열고 들어온 자식을 본 어머니는 '왜 이제 왔냐'고 묻지 않고 담담히 "왔냐"고 말씀하시지만 그 한마디에는 기다림의 시간과 반가움이 함께 담겨 있었다.
이후에도 삶의 조건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자식은 여전히 바쁘고 어머니의 하루는 여전히 길다. 그러나 달라진 것이 있다. 기다리기만 하던 관계 속에 서로 한 걸음 다가간 흔적이 생긴 것이다. 어머니는 마을 복지회관에 나가 운동도 시작하셨다. 기다림 속에만 머물지 않고 자신의 몸과 하루를 돌보기로 하신 것이다.
개인심리학(Individual Psychology) 창시자인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는 인간이 사건보다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살아간다고 보았다. 어머니는 기다림을 사랑이라 여겼고, 아들은 '언젠가 가면 된다'는 마음으로 관계를 미뤄왔다. 하지만 그 선택들은 결국 서로의 거리를 만들고 있었다.
관계는 저절로 이어지지 않는다. 전화 한 통, 짧은 방문 한 번은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선택이다. 기다림을 넘어 먼저 손을 내미는 것, 미루던 마음을 오늘로 가져오는 것. 그것이 관계를 살리는 용기다. 어쩌면 부모가 기다리는 것은 거창한 효도가 아니라 "잘 지내?"라는 안부 한마디와 함께하는 잠깐의 시간인지도 모른다. 사랑은 마음속에 오래 담아두는 것이 아니라, 오늘 표현할 때 비로소 관계가 된다. 5월 가정의 달, 우리는 평소에 누구를 기다리게 하고 있는지, 또 누구에게 먼저 다가가고 있는지 돌아볼 시간이다. <우정애 아들러심리전략연구소 대표>
■기사제보▷카카오톡 : '한라일보' 또는 '한라일보 뉴스'를 검색해 채널 추가
▷전화 : 064-750-2200 ▷문자 : 010-3337-2531 ▷이메일 : hl@ihalla.com
▶한라일보 유튜브 구독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