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훈의 제주마을 백리백경.. 가름 따라, 풍광 따라] (21)표선면 가시리

[양기훈의 제주마을 백리백경.. 가름 따라, 풍광 따라] (21)표선면 가시리
목장과 오름, 그 잠재력으로 웅비하는 마을
  • 입력 : 2022. 10.28(금) 00:00
  • 김채현 기자 hakch@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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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섬 제주의 리 단위에서 이렇게 면적이 큰 마을은 쉽게 찾기 힘들 것이다. 56㎢라는 면적의 의미가 그저 숫자로 읽혀질 것 같아 우도면 면적 6.18㎢, 군청이 있는 울릉군 면적 72.9㎢와 비교하여 봤다. 대충 어느 정도인지 감이 잡힐 것이다. 이렇게 큰 마을이 단일 마을공동체로 700여년의 역사를 이어온 힘이 크기보다 더욱 놀랍다. 그만큼 견고한 유대감과 운명공동체라고 하는 의식이 뿌리 깊게 박혀있어서 그럴 것이다.

옛날에는 가스름이라고 불러오다가 한자 명칭으로 바뀌면서 가시리(加時里)가 되었다. 한문 뜻이 너무도 의미가 깊고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시간, 세월을 더해가는 곳. 더해갈 것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며 그러한 존재임을 너른 목장지대를 거닐다보면 느끼게 된다.

어떤 시간들이 차원의 영역에서 중첩되어 더해지고 있을까? 전해지기로, 청주 한씨 입도조 한천이 제주에 들어와 터를 잡은 곳이라고 한다. 고려말에 대제학을 지낸 학자. 이성계 제거 모의에 연루되어 섬 제주로 가족과 함께 유배되었다.

그래서 가시리에는 충의사가 있다. 500년 뒤에 제주에 유배왔던 면암 최익현 선생이 감복의 비문을 남겼으니 충의사 들어가는 입구에 있다. 加時! 세월이 흘러도, 곧은 사람은 곧은 사람을 알아본다 했던가.

가시리는 본동, 안좌동, 두리동, 폭남동, 역지동, 생기동과 같은 6개의 작은 동네들이 모여 큰 마을을 이루고 있다. 마을공동체가 소유한 땅만 742만㎢(225만평)이나 된다. 가시리 번지를 달고 있는 오름만 13개 정도. 설오름, 병곳오름, 따라비오름, 큰사슴이오름, 작은사슴이오름, 갑선이오름, 번널오름, 붉은오름, 여문영아리오름, 거문오름, 구두리오름, 마은이옆오름, 쳇망오름. 단순하게 땅부자 마을로 보기에는 보유하고 있는 자연자원이 가진 에너지가 너욱 무섭게 다가온다.

이렇게 너른 영역을 가지게 된 것은 마을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조선왕조시대에 제주섬 중산간 대부분 지역은 국영목장이었다. 거기에서 으뜸으로 치는 마장이 있던 갑마장 영역이다. 최고의 말들을 모아 기르던 곳이기에 목장지대로 완벽에 가까운 환경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러 곳에 남아있는 잣성 흔적들은 목축문화의 깊고 긴 여운을 노래하는 듯하다.

4·3의 상처가 너무나도 깊은 마을이다. 대부분의 중산간 마을이 불타던 그 때, 514명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던 것으로 공식기록에는 남아 있다. 안타깝게도 여러 가지 이유로 하여 공식 기록에 남아있지 않은 분들 또한 많다고 한다. 지금 마을은 그 처참한 비극의 현장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다시 재건한 생존의 터전이라고 한다. 조상 대대로 제주목축문화의 최고봉임을 자부하던 이 마을이 4·3 광풍에 쓰러졌다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불굴의 의지와 용기가 오늘의 가시리를 만들었다. 그런 과정에서 싹트고 다시 뿌리내리기 시작한 의식이 있다면 마을공동체 재산은 조상들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만 물려준 것이 아니라 우리 후손들 모두에게 영원히 물려준 유산이라는 생각이다. 지금 우리는 후손들에게 잠시 빌려 쓰는 것이고.

오종수 이장에게 가시리의 가장 큰 자부심을 묻자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지하 생수자원입니다." 가시리 영역에서 뽑아 올리는 지하수. 최고 품질의 화산암반수를 가지고 가시리민 모두가 생활하고 있으니 현대사회에 있어서 '이보다 더 큰 혜택이 어디 있겠느냐'는 주장이다.

땅이 넓은 만큼, 땅 밑에 있는 생수자원도 풍부하다는 합리적 해석과 함께. 물 자원이 가지는 힘은 단순하게 경제적 측면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다. 위치적으로 오염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져야 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 그동안 수많은 개발업자들이 마을 땅을 사기 위하여 갖은 유혹을 했지만 거부하면서 지켜온 환경 의지가 이런 자긍심을 보유하게 된 토대가 되었다.

加時! 가시리가 더해갈 시간은 마을 전체 공간에 흐르고 있다. 시간이 더해져 다음 세대로 이어지며 끊임없이 자연을 지키는 힘으로 웅비할 가치 중심 마을. 길게 보고 멀리 가는 방법을 터득한 사람들.

<시각예술가>



동카름 오르막길에서
<수채화 79cm×35cm>


눈부신 가을날, 북쪽 하늘에 옅은 구름이 지나니 파란 하늘을 대신하여 오르막길 양쪽 지붕이 파랗다. 평면에서의 길은 화면의 중심에서 끊어져 한쪽 귀퉁이가 하늘과 잇닿아 있다. 구도로 생각하면 그 지점을 그리려 하였다. 하늘과 땅이 만나는 방법은 우리의 시선 경험 속에서 다양하고 방대하다. 여기 가시리에서 땅이 하늘과 만나는 방법은 집과 집 사이에 난 길 속에서 찾는다. 삶의 소중한 가치가 길과 하늘의 만남을 주선하거나, 그 존귀함을 양옆에서 협시하는 분위기를 걸어가는 과정에서 발견한 것이다. 오르막 길 저 편에 지붕만 보이는 집들로 하여 공간적 '다음'은 완결되었다. 농촌마을의 소박한 일상이 풍경 속에 자기 위치를 차지하며 드러나 있다. 시월 하순이라는 시간성은 누렇게 변해가는 잎사귀들이 초록색과 오버랩되는 듯하다. 미세한 변화를 색으로 잡아내는 작업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차선이 그려진 아스팔트길. 광선이 너무 강하여 짙은 회색의 길조차 담백한 반사광의 포로가 되었다. 길 오른쪽 근경의 자갈들이 매끈한 포장도로와 질감 대비를 이룬다. 그저 스쳐 지나가기 딱 좋은 너무도 평범한 농촌마을 안길의 모습에서 실존의 일상성은 이다지도 눈부시게 빛나는 것을. 오르려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오르게 되는 길. 여기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공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모든 의미들을 담으려 하였다. 돌담 시절 또한 아주 절묘하게 함께 공존하는 메시지가 되어 화면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 가을이라서 그린 길이다.



대록산 남쪽에서 바라본 시월풍경
<수채화 79cm×35cm>


놀라움은 시간의 충돌에서 발생하곤 한다. 상강이 지난 가을 들녘에 쏟아지는 태양, 그 아래 눈부시게 빛나는 억새. 누가 봐도 가을을 느끼게 하는 그 억새밭 앞에 연두색이 깔려 있다. 그림으로는 단순 색채대비일지 모르나, 가을이 다른 계절과 만나고 있으니 경이로운 것. 겨울을 건너뛰고 내년 봄과 마주하는 모습이 여기 큰사슴이오름(대록산)에 펼쳐지고 있다. 필경 내년 봄 일찍 피어난 유채꽃을 위하여 파종한 것이리라. 이른 봄에 피어있는 유채꽃을 만끽하는 사람들에게 이 가을 땅바닥에서부터 시작하여 겨울을 이겨낸 과정을 보여주고 싶은 생각에서 그렸다. 중산간이라 겨울 추위가 더 심할 것이거늘, 이겨낼 것이다. 짙은 언덕 뒤 멀리 보이는 한라산은 참으로 매력적이다. 강렬한 햇살의 두께에 밀려나 멀리서 신비감을 주는 이유는 산이 보유한 삼각형에 근접한 능선을 보여주기에 그러하다. 박공지붕의 물매 각도를 오차범위 내에서 형상화 한 모습이다. 하여, 집이다. 한라산은 집이다. 안식을 주는 삶의 공간. 누가 저기 사는가? 숨 쉬는 모든 것들을 품어 살아가게 하는 생명의 공간. 잔디운동장을 만든 너른 평지에 돌담처럼 서쪽이 언덕으로 가려진 곳. 가시리 목장지대라고 하는 환경에서 느낄 수 있는 독특한 구성이다. 땅바닥이 단순한 평평함을 미세한 대각으로 분할하는 것은 의도되지 않은 화면상의 쾌감이다. 마을마다 보유한 한라산의 모습은 다르다. 가시리 한라산을 그렸다. 수직의 현실 속에 수평의 위안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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