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되돌린 그때 그 추억](7)제주시 용담동 강응인씨

[사진으로 되돌린 그때 그 추억](7)제주시 용담동 강응인씨
전쟁도 갈라놓지 못한 세 남자의 '형제애'
  • 입력 : 2012. 02.16(목) 00:00
  • 이효형 기자 hhlee@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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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故 고두오씨와 김현병·강응인씨.

제주시 도두동 함께 살며 4·3에 6·25까지 겪어
평생 동고동락 한다며 1965년 의형제 맺기도


1965년 4월의 봄날. 이 때 나이 한명은 서른 둘, 나머지 둘은 세살 어린 스물 아홉 동갑이었다. 세 청년은 의형제를 맺고 사진을 찍었다. 형은 가운데 앉아 있고 동생 둘은 뒤에 서 있다. 사진 밑에는 '사나의 決心 三兄弟 1965. 4. 6'라고 씌여 있다.

의형제의 맏형인 강응인(80)씨는 방에 고이 간직해 둔 상자에서 흑백 사진을 꺼내들더니 잠시 눈을 감았다.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이윽고 눈을 뜨고 말문을 열었다. "오랜만에 꺼낸 사진이야."

▲강응인씨

강씨는 사진을 보며 "왼쪽이 육군을 나와 공장을 다닌 고두오고, 오른쪽이 해병대 나와 점방을 운영한 김현병이야. 셋 다 나이는 나보다 3살 어려. 사진은 1965년에 찍었지만, 1940년 무렵부터 우리는 함께였지"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세 사람은 제주시 도두동에서 살며 도두국민학교를 같이 다녔고, 어느샌가 줄곧 뭉쳐 다녔다.

"당시 동네 어른들 사이에서는 꽤나 유명했지. 감자를 서리해서 쪄 먹기도 했어." 강씨는 어릴적 기억을 하나하나 되짚어 갔다.

"동생들이 잘 따르기도 했지만 서로 싸워본 적도 없어. 나는 6형제 중 넷째였지만 이 친구들도 형제나 다름 없었지" 강씨는 말했다.

하지만 세 사람의 10대 시절은 대한민국의 격변기였다. 광복 후 4·3사건이 터지고, 연이어 6·25전쟁까지… 결국 세 사람을 갈라놓고 말았다.

"내가 열 아홉살이었을 때였을거야. 1950년 전쟁이 터지자 나는 육군으로 입대를 했지. 두 친구는 이듬해인 1951년 입대를 했어. 두오는 육군으로, 현병은 해병대를 갔지. 전쟁 중에는 연락할 방법이 없었지.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었어."

전쟁은 휴전으로 일단락되자 강씨는 을지무공훈장을 받고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도두동으로 돌아왔다. 당시 도두는 4·3의 상처를 극복하고 마을재건에 한창이었다.

강씨도 마을 재건에 온 힘을 쏟았다. 재건 작업을 하던 중 반가운 얼굴들을 만날 수 있었다. 고씨와 김씨였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 그간의 회포를 풀었지. 그리고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함께 재건 작업을 했어. 당시 두오는 공장을 다녔고, 현병이는 장사를 했어. 나는 어부를 했지."

세 사람은 자연스레 다시 어릴 적처럼 함께했다. 세명 모두 결혼을 한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1965년. 그들은 의형제를 맺었다.

이 후 세 사람은 모두 도두동을 떠났지만 인연의 끈은 놓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두오는 5년 전 먼저 세상을 떠났어. 나와 현병이는 두오의 마지막을 함께했지. 시간이 많이 흘렀어" 강씨는 사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오랜만에 사진을 보니 어릴 적 생각도 많이 나네. 고맙네." 강씨의 마지막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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