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가장 괴로운 것은 조밥이고, 가장 두려운 것은 뱀이며, 가장 슬픈 것은 파도소리다."
1628년부터 1635년까지 만 7년간의 제주 유배 생활을 한 선조 손자 이건은 '제주풍토기'에서 이렇게 토로했다. 이건이 겪은 가장 괴로운 조밥은 곧 제주인의 척박한 삶을 상징한다. 물이 잘 고이지 않는 화산섬의 특징과 수분을 머금지 못하는 화산재 토양 탓에, 제주는 논농사가 거의 불가능했다. 쌀과 보리가 들어설 자리는 '조'가 차지했고, 이 좁쌀은 제주인의 곤궁한 삶과 애환을 대변하는 작물이었다.
그만큼 과거에는 쌀밥을 뜻하는 제주어인 '곤밥'이 귀하디귀한 소망 그 자체였다. 이 꿈같은 '곤밥'을 현실로 만들어준 한 어르신의 일대기가 책으로 탄생했다. 제주 최초의 민간 주도 관개수로 개척자, 김광종(1792~1879) 어르신이다.
제주 출신인 이 책의 저자는 척박한 땅에 '논하르방'으로 불리는 기적을 일구기까지 약 10년의 김 어르신 대장정을 그려냈다.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부어 관개수로 공사에 매달린 그는 1832년부터 1841년까지 서귀포시 안덕면 화순리 황개천 근처 '세오래왓'에 움막을 지어 살며 암벽과 바위를 뚫는 악전고투를 벌였다. 당대의 열악한 장비속에서 바위에 장작과 고소리술로 불을 질러 깨트리며 670m(논까지 연장 길이 1100m)에 달하는 물길을 개척했다. 그 결과, 창고천의 물은 황개천 일대 최고 5만평 논에 성공적으로 흘러들었다. 이로써 제주 주민들은 귀한 곤밥을 지어 먹을 수 있게 됐고, 이는 단순히 식생활 개선을 넘어 공동체 삶과 문화를 풍요롭게 만들었다.
김광종 어르신의 헌신은 후세에 깊은 울림을 남겼다. 1938년 후손과 주민들은 그의 공덕을 기리는 '김광종영서불망비'를 화순리 도채비빌레 동산에 세웠다. 비문에는 '그의 공로 덕분에 주민들이 향그러운 쌀을 먹을 수 있다'며 그를 전한시대 태수 소신신에 비유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 불망비는 현재 제주특별자치도 향토유형유산 제39호로 지정됐다.
이 책을 기획한 김광종 어르신 5세손은 "이 책은 김 할아버님의 관개수로 개척 이야기를 기억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기록으로 전하려는 후손의 소박한 마음"이라고 밝혔다.
저자는 "김 어르신은 주변 비웃음과 조롱을 무릅쓰고 불굴의 의지와 집념으로 10년만에 관개수로를 완공해 화순리를 비롯한 제주 사람들이 제사상에 '메'를 올리고 가족들과 '곤밥'을 먹을 수 있게 했다"며 "온갖 역경을 극복하며 이웃을 생각하는 김 어르신의 '개척'과 '애민'정신은 과거 19세기만의 것이 아닌, 21세기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컬쳐플러스. 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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