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훈의 제주마을 백리백경.. 가름 따라, 풍광 따라] (95)한림읍 상대리

[양기훈의 제주마을 백리백경.. 가름 따라, 풍광 따라] (95)한림읍 상대리
평화로운 느낌 가득한 정겨운 힐링 농촌
  • 입력 : 2025. 08.29(금) 03:30
  • 고성현 기자 kss0817@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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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나지막한 천아오름 주변 아름다운 농로를 따라 걸으면 야릇한 평온이 솟아나는 것을 느끼게 된다. 튀어나와 잘난척 하는 것이 없으니 그럴 것이다. 가끔 눈에 들어오는 밭 주변 대나무들이 집터가 있던 곳임을 설명하는 듯하다. 간혹 만나게 되는 연못들은 식용수나 가축들이 물을 마실 수 있는 여건을 제공했던 삶의 근원. 4·3 이전까지만 해도 무려 14개 동네가 분산돼 있던 대촌락이었다.

고유지명 속에 숨어 있는 음절 속에 마을 역사의 숨결이 살아 숨 쉰다. 역고못, 돌개기, 송애못, 한산이왓, 웃천아오름, 알천아오름, 종구실. 사원이다리, 고한이, 못거리, 장수모를, 돔방굴, 케왓, 알가름 등. 조상 대대로 이웃해 살아온 마을이 불타고 다시 재건돼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종구실 지역과 못거리라고 불리던 지항동, 한림3리와 인접한 알동네 정도다. 상대리는 천아오름 인근뿐만 아니라, 직선거리가 4㎞가 넘고 총면적은 1037㏊나 되는 큰 마을이다. 마을 면적에 비해서 주민수가 적다는 것은 귀농귀촌의 적지라는 뜻도 된다.

장경하 상대리 이장

조선시대 한림16경의 하나라고 하는 상대과원이 있던 마을이다. 곳곳에 감귤과원이 조성돼 있어서 참으로 풍요로운 마을로 기록돼 있다. 그 시절에는 대촌리라는 마을 명칭을 사용했다고 하는데 상대리, 중대리, 하대리를 모두 합하여 이르는 말이었다고 전해진다. 그 대촌리의 윗동네라고 할 수 있는 상대리가 지금도 남아 있는 것이다. 지금은 연꽃으로 가득한 돌개기연못을 한림천의 발원지로 보고 있다. 냇가를 따라서 이어진 어떤 동질감들이 농경사회였던 조선시대의 지역적 공감대가 아니었을까? 농로가 참으로 아름답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주는 정겨움도 그러거니와 묘한 생동감이 느껴지는 정겨움.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마을 주민들에게 농로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면 그냥 웃으신다. 주변 마을들과 이어지는 넓은 자동차 도로도 중요하지만, 농로들이 지닌 옛 정취는 멀리 한라산에서부터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탁 트인 곳이 많아서 더욱 시각적 풍요를 맛볼 수 있게 한다. 농로의 매력은 간혹 더 갈 수 없는 막힘에 있다. 되돌아가야 하는 짜릿함이라고나 할까? 걷기를 좋아하는 분들에게 상대리의 농로길을 권하고 싶은 필자의 마음이다. 순박한 길에서 얻는 힐링은 참으로 좋다.

장경하 이장에게 상대리가 보유하고 있는 가장 큰 자긍심을 묻자 "일찍 일어나는 사람들"이라고 응축된 대답을 내놨다. 아침을 여는 마을이라고 하는 슬로건과 일맥상통하는 메시지이면서도 조상 대대로 부지런한 근면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낸 호쾌함이 드러난다. 얼핏 들으면 농촌마을이 지닌 보편적 가치관이요, 삶의 자세를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겸손한 표현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너른 경작지를 보유하고서 농사일을 해야 했던 조상들은 너무도 당연하게 해뜨기 전에 일어나 밭으로 나가야 했다. 그러한 생활문화가 그대로 뿌리내려와 후손들의 유전자 속에도 흐르는 것이라고 한다. 거기에 숨겨진 야릇한 풍토까지 엿볼 수 있는 것이 새로운 도전적 상황이 발생하면 먼저 팔을 걷어붙이는 진취적인 기상이 있다는 의미. 뒤따르지 않고 앞서가겠다는 일 욕심. 필자가 상대리라고 하는 마을 이름이 나오면 그러한 자세와 관련한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94세 할머니가 밭에 가서 김매기를 해야 하는데, 아들들이 급한 일로 밭에 모시고 갈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콜택시를 불러서라도 기어코 밭에 가고야 만다는 이야기. 밭에서 일을 하지 않으면 좀이 쑤시고 죄를 지은 사람마냥 안절부절못하는 품성이 오늘의 상대리를 있게 했다고 강조하는 어르신들.

시간에 쫓겨서 4·3 이전에 있었던 동네들을 모두 돌아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옛 동네들에 위치했던 우물들과 연못, 소로길들과 지금의 자연환경을 보존해 관광자원화 한다면 농업 이외의 발전 잠재력도 충분하다. 농업경관이 보유하고 있는 차분한 느낌과 저 터전을 지켜온 사람들의 정갈한 품성을 만끽할 수 있다면 이는 또 하나의 힐링충전소가 될 수 있는 가능성. <시각예술가>



멀리 수평선이 보이는 감귤밭
<수채화 79㎝×35㎝>

8월의 뙤약볕은 그늘에서 그려야 더욱 뚜렷하다. 동쪽으로 향해 있는 유리창에 희미하게 반사된 수평선과 과수원은 놀라운 확률적 발견이다. 어찌 생각하면 중산간 마을이라고 할 수 있는 이곳에서 수평선을, 그것도 감귤밭과 함께 그릴 수 있다는 경이로움으로 강렬한 태양광선과 반사광선의 상호관계를 치밀하게 그려나갔다. 상대과원이라고 하는 옛 역사성이 유리창에 반사되고 있음을 상징하고 싶었다. 거기에다가 '아침을 여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을 동쪽 창문에 투영시키고 싶었고. 집과 과수원 사이 돌담은 그늘 속에서 더욱 짙은 무게감을 보여준다. 초가였던 시절부터 있었으리라는 이 마을 고참님이시라는 생각에 숙연해진다. 여름날 해양성 뭉게구름이 하늘을 수놓아 더욱 풍요롭다. 어떤 경이로운 풍경은 처음엔 놀라움을 주겠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식상해지는 것. 하지만 너무도 평범한 이 마을의 집과 밭, 멀리 수평선의 조화는 실증과의 전쟁에서 항상 승리를 거둔다. 이유는 분명하다. 삶의 터전이 있는 그대로의 진솔함이니까.

화면 오른쪽에 배치된 땅과 바다, 하늘.그리고 왼쪽에 있는 집이 그 셋을 큰 무게감으로 지배하고 있는 구도적 형국이다. 면적 대비로 볼 때 그 중요성과 강조하고 싶은 메시지를 그림이라고 하는 상황논리로 표현한 것이다. 한 가족의 살아가는 공간은 그 어떤 거창한 존재들보다도 소중하고 가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작업이기에. 저 유리창 속 방에서는 어떤 아침 해가 뜨나? 몹시 궁금하다.



천아오름 동쪽에서
<수채화 79㎝×35㎝>

무성한 풀잎이 눈부시게 빛나는 길가에서 천아오름을 바라보며 그렸다. 한림천의 발원지라고 이야기하는 돌개기연못을 답사하고 내려오다가 만난 편안한 모습이다. '왜 이토록 안온한 느낌을 주는 것일까' 스스로에게 궁금해 한참을 생각하니 어린 시절 초가 곡선이 하늘과 마주하고 있어서 그렇다는 판단에 이르게 되자 그리게 된 것이다. 천아오름이라고 하는 명칭을 가진 오름이 두 곳이다. 비교적 한라산과 가까이 있는 광령리지경 천아오름과 이곳 상대리의 천아오름이다.

여름날 오후의 눈부신 햇살이 오름의 실루엣을 강조하기 시작하면 오름의 동쪽에 펼쳐진 나무들이며 풀잎들의 존재는 더욱 부각된다. 자연광선이 발생시키는 깊이와 공간감을 이 시기의 뜨거운 기온과 부합되게 그리고자 한 것이다. 짙거나 연한 빛깔들을 만드는 것은 그 식물의 본연의 것일 수도 있으나 광선의 영향과 배경이라고 하는 공간과 견주어져서 도드라지는 경우가 있다. 이 상황은 명료하게 3단계다. 바탕이 되는 원경의 천아오름과 중경이라고 할 수 있는 삼나무 종류의 배열, 그 나무를 배경으로 가까운 곳에서 싱그럽게 춤추는 연두색 풀잎들이다.

멀리 오름 능선의 소나무들은 참으로 어떤 정한을 보여주는 서정성이 있다. 연필담채에 가깝게 많은 부분 소묘를 통해 명도에서 느낄 수 있는 광선을 묘사하고서 채색은 최소한으로 표현했다. 어떤 의미에서 판화적인 명료성이 부각된 상황이기에 그런 것이다. 평이해 보이나 깊이 바라보면 놀라운 정감이 숨어 있는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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