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의 제주문화사전] (31)공필화가 이미선

[김유정의 제주문화사전] (31)공필화가 이미선
영락궁 벽화 신선그림 제주 신화(神畵)의 가능성 열어
  • 입력 : 2020. 10.19(월)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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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유학서 궁중회화 기법 배워
원나라시대 벽화 보고 감동 모사
제주신화도 새로운 기대를 안겨

#다투지 않는 물

이충익(李忠翊, 1744~1816)은 말한다.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에, 계속 이어가는 것이 좋은 것이다(繼之者善也)라는 말이 있다. 대립하지 않고 저절로 그렇게 되어 좋은 것을 '최선(最善)'이라고 하는 것이다. 맹자는 이것을 양능(良能, 본래 저절로 되는 능력)이라고 믿었다. 물이 만물을 이롭게 하고 남들이 있기 싫어하는 곳으로 흘러가며 모두를 좋게 할 수 있으니 이것은 저절로 그렇게 되는 본래의 능력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투지 않는다."

이미선 작가의 공필화 작업 모습.

우리는 오래 이어가는 것을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자꾸 새로운 것에 현혹되기 때문에 근원을 확인치도 않고 빨리 따라 하려고 하는 마음 때문이다. 마음이 급하면 이어가기 어려운데 그 어려움 때문에 조급한 나머지 그것을 뒤떨어진 행동이라고 빈정거리기도 한다. 걸음도 잘 걸으려면 첫 도보(徒步)를 계속 이어가야 하고 잘 걸어야만이 뛰기도 쉬운 법이어서 잘 걷는 걸음이 멈추는 것 같아 보여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사람들은 서기도 어려운 아기를 보며 어서 달리기를 원하는 습성이 있다. 마음이 조급해서이다.

화가는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다. 그들의 운명은 자신의 화업을 어떤 표현으로 어떻게 자신의 미학을 찾아내느냐에 일생을 거는 것이다. 평생 수행자이기도 하고 탐험자가 된다.

#화가 이미선

임모(臨模)란 말 그대로 서화(書화) 묘사(描寫)의 한 방법으로 서화나 벽화를 원전으로 삼아 그림 옆에서 그것을 보며 따라 그리는 것을 말한다. 흔히 서(書)인 경우는 이를 임서(臨書)라 하고 그림인 경우 임모화라고 한다. 형태(形態)를 되도록 충실하게 원전과 일치시키기 위하여 원작 벽화의 분위기를 그대로 살리고, 그것의 필선과 동세, 색채의 채도와 명도를 통해 오히려 원작의 참모습을 전할 수가 있으며, 많은 공력이 들기 때문에 전통 화풍이나 고전 회화 연구를 위해 종종 행해지는 좋은 회화 수련 방법이다.

영락궁 삼청전 벽화 '조원도' 1, 피지에 진채, 4m×2.5m

1995년 이미선은 26세가 되는 여름, 중국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서불이 지나친 곳, 서귀포에서 거꾸로 서불의 나라를 찾아갔다. 정통 공필화법을 배우기 위해서이다. 공필화란 비단에 그리는 그림으로, 가는 붓으로 대상물을 정교하고 세밀하게, 고운 색이 스밀 때까지 공들여 채색하는 궁중회화의 한 기법이다. 그가 동덕여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찾아간 곳은 노신미술대학원으로 그녀는 거기에서 사생을 위해 중국 전역을 다니며 남녀노소의 인물화와 명산대천의 산수화, 온갖 화조화 그리는 법을 공부했다.

25년이 지난 그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중국 불교 예술을 체득하기 위해 깐수(甘肅)성의 돈황석굴, 허난(河南)성의 용문석굴을 견학했고 공자의 유교문화를 배우기 위해 산둥(山東)성 공부(孔夫, 孔廟, 三孔)를 방문했던 일이다. 그녀가 중국의 명작 예술을 직접 감상하면서 알 수 있었던 것은 중국문화는 유·불·선의 결합체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던 중 학업의 일환으로 영락궁 벽화를 관람하게 됐고, 그 벽화를 본 순간 감정이 살아났다. 영락궁은 중국에서 가장 큰 원나라의 도교 궁관으로 그곳의 벽화에도 도교 사상이 짙게 깃들어 있었다.

영락궁 삼청전 벽화 '조원도' 2, 피지에 진채, 4m×2.5m

영락궁 벽화의 색채는 화려하거나 현란하지 않았다. 거기에 은은함이 스며 있어 700여 년 전 작품임에도 세련미가 손색이 없었다. 특히 웅장한 규모와 선묘의 수려함에 매번 놀라면서 매료됐다. 이미선은 그림에 끌려 마치 계시를 받은 것처럼 영락궁 벽화를 그려 보기로 결심했다. 길이 4m에 폭 2~4m.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그림에 매달렸다. 작품 3점을 완성하기까지 족히 1년이 걸렸다. 이 벽화 앞에서 직접 그리는 방식이 바로 임모화이다. 제주에 돌아와서 줄곧 20여 년을 한국에서 비단에 그리는 궁중화법인 공필화가로 활동하고 있다.

#영락궁 벽화

영락궁은 도교의 궁관(宮官)으로 현재 산서성 예성현 북쪽 3km에 있는 용천촌(龍泉村) 동편에 있다. 규모가 크고 아름답다. 원래 궁전의 터전은 예성현 서쪽 20km에 영락진(永樂鎭)에 있었다. 전진도(全眞道) 북오조(北五祖) 중의 한 사람인 여동빈(呂洞賓)의 옛 거처를 개조해 만들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여공사(呂公祠)였는데 금나라 말기 여동빈의 신화가 널리 퍼지면서 그를 제사하는 사람이 많아졌고, 사당도 점차로 증축되고 여동빈도 존숭되면서 그 사당이 확대돼 도관(道觀)이 되었으나 원나라 태종(太宗) 3년(1231) 화재가 나 부분적으로 훼손되었다. 화재 후 황제는 관(觀)으로 승격시켰고, 여동빈 진인(眞人)을 '천존(天尊)'으로 봉하면서 영락궁, 일명 '대순양만수궁(大舜陽萬壽宮)'을 지었다. 중통(中統) 3년(1262) 궁관의 골격이 갖춰졌고, 지원(至元) 31년(1294)에 용호전(龍虎殿)이, 태정(泰定) 2년(1325)에 삼청전이, 지정(至正) 18년(1358)에 순양전(純陽殿)의 벽화가 완성되었다. 영락궁의 건축은 무려 110여 년 동안 계속되다가 원나라의 멸망이 가까워지면서 중단되었다. 궁은 궁문(宮門), 중양전(重陽殿)을 포함하여 모두 5채인데 삼청전(三淸殿)의 건물이 가장 크게 만들어졌으며, 궁은 황궁의 배치와 비슷하다. 각각의 건물에는 정밀하고 아름다운 원대(元代)의 벽화가 그려졌는데 그 면적이 무려 3000여 평(坪)에 이른다. 영락궁의 옛 터전은 심문협(三門峽) 댐 공사로 수몰되어 1959년부터 건축물 전부와 벽화가 새 터전으로 옮겨 원형을 보전하고 있다. 중국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全國中點文物保護單位)로 지정되어 있다(사가데 요시노부, 2018).

영락궁 삼청전 벽화 '조원도' 3, 피지에 진채, 4m×2.5m

영락궁은 전진교 중심지인데 그 곳 삼청전에 그려진 벽화 '조원도(朝元圖)'에는 8명의 신선을 중심으로 각각의 인물 280여 명을 그렸다. 다양한 형상의 표현에 규모가 웅대하고 금분으로 장식하여 원나라 시대 벽화의 풍모가 잘 보존돼 있다. 삼청전의 벽화는 화공인 마군상(馬君祥) 등이 그렸고, 순양전(純陽殿)의 벽화는 네 명의 신선의 그림과 종리권(鍾離權)의 심리상태를 생동감 있게 그려졌다(중국미술사교연실편저, 1998).

이미선이 1년에 걸쳐 임모한 3점의 벽화는 바로 영락궁 삼청전의 주요 신선이 등장하는 부분을 그린 것이다. 이 벽화를 통해서 원나라 시대 신선사상의 풍부한 상상력과 탁월하고 아름다운 필력을 엿볼 수 있으며, 이후 이미선의 공필화 작업에 중요하게 작용하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 임모의 전통은 오래된 회화 학습 방법이다. 그 중 소문난 사람이 중국화가 장대천(張大千)이다. 그는 문명을 뒤로 한 채 중국 서쪽 천불동의 막고굴(莫高窟)에서 고행하는 수도승처럼 밤낮으로 수·당시대의 벽화들을 임모(臨模)했는데 무려 31개월 간이나 그렸다. 그 결과 장대천에 의해 중국 역대 불상과 보살의 수인(手印)의 비밀이 체득되면서 밝혀지기도 했다.

#제주 신화의 새로운 가능성 전망

영락궁 삼청전의 벽화가 도교 사상의 백미이며 1325년에 그려졌으니, 당시 원나라는 1294년 탐라를 고려에 다시 환속시킨 지 6년이 지난 때이다. 원나라가 도교를 중흥시켰던 것으로 보아 그 벽화의 채색화 방식이 98년 총관부를 두고 지배했던 탐라의 도관(道觀)이나 절간 벽화와 무신도에 영향을 끼치고도 남았으며, 실제로 제주내왓당 무신도 10신위의 화려한 채색화가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것에서도 여실히 그 기원을 유추할 수가 있다. 하여, 신화의 고향인 제주도의 신들을 상상하고 그림에 있어서 더 없이 중요한 기법을 습득해 온 화가 이미선의 어깨가 무겁게 되었으며, 지금 공필화의 기법으로 작품을 보여주는 것 또한 '이루후제' 제주 신화도(神話圖)의 가능성을 새롭게 예상케 해준다.

<김유정 미술평론가(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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