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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 장편 연재/갈바람 광시곡
[강준 장편 연재] 갈바람 광시곡(12)
편집부 기자 hl@ihalla.com
입력 : 2019. 05.16. 19: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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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 작/고재만 그림
5-2. 사랑과 미움의 간극




용찬은 대학 입학원서를 내고 시골집에 내려와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렸다.

배를 깔고 누워 소설책을 읽는데, 자동차 클랙슨 소리에 이어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금산이라는 걸 직감했다. 금산이 면허증을 따려고 운전 연습을 할 때 시골집까지 데려다준 적이 있어서다. '육지에서 언제 왔지?' 용찬은 반가운 마음에 웃옷을 걸치며 밖으로 나갔다. 흰색 승용차 창밖으로 왕금산이 얼굴을 내밀고 손을 흔들었는데, 의외로 그의 옆에는 선글라스를 낀 젊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삽화=고재만 화백

신년 휴가를 얻은 금산이 여자 친구를 자랑하고 싶어서 찾아온 모양이었다. 용찬은 그들을 해변에 있는 카페로 안내했다. 금산은 2급 정비기술자 자격증을 따서 인천에 있는 정비공장에 취직했다고 자랑했다.

"인천엔 차이나타운이 유명하거든. 화교들이 많이 도와주는 덕분에 나 월급 많이 받아. 우리 화교들 말이야, 단결력이 아주 강하거든. 뜻만 맞으면 십억 정도는 금방이라도 모아줄 수 있다고."

금산은 인천 토박이 대학생이라는 여자 친구에게 유세 떨며 웃었다.

"헌데, 종필이 아버지 웃기지 않니? 빚 갚을 생각은 않고 집세를 더 올리겠다는 거야. 그것도 빚진 돈에서 까는 게 아니고 현금을 달라니 나 원 참."

장 씨 집안 이야기가 나오자 용찬은 노골적으로 적개심을 드러냈다.

"장석규, 아주 나쁜 사람이네."

"99개를 가진 놈들은 백 개를 채우려고, 하나 가진 사람 것을 빼앗는 거야."

"백 개를 가지면 백 하나를 갖고 싶겠지. 사람 욕심 끝도 없어."

"맞아. 그러니 억울하면 돈을 벌어야지. 난 이참에 식당 건물 인수해버리라고 했어. 선거할 때 우리 아버지 돈도 많이 가져다 썼거든."

금산의 배포는 더 커져 있었다. 그는 이야기하며 여대생의 눈치를 자주 살폈는데, 그건 외국인으로서 느끼는 자격지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난 귀화해서 한국인이 되기를 원하지만, 아버지가 반대해서 못 해. 순수 혈통을 위해 한족 여자와 결혼하라는데 난 중국인 3세야. 이 땅에서 살려면 한국 여자와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해. 독립하게 되면 난 귀화할 거야."

금산이 현실주의자처럼 말했지만, 이 말은 여자 친구를 위한 립 서비스라고 생각했다. 대륙으로의 진출을 꿈꾸는 금산의 속마음을 용찬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짐을 정리하려고 자취방에 들렀는데, 해연이 꽃다발을 들고 찾아왔다
해연은 화사한 분홍색 외투 때문인지 완연한 여인네 풍모를 드러냈다
인간은 합리화의 동물이란 걸 용찬은 그때 터득했다




1월이 끝나갈 무렵 용찬은 서울 지역 대학에 합격했다는 통지를 받았다. 학교 정문 앞에는 대학합격자 명단이 나붙고 들썩였지만, 용찬은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억누르며 조용히 고향 집에서 보냈다.

합격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기쁨의 눈물을 보였다. 그 눈물 속엔 학비, 하숙비와 용돈 조달 등 걱정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용찬이 모를 리 없었다.

원서를 쓸 때부터 어머니는 제주에서 대학을 하면 안 되겠냐고 여러 번 권유했었다. 그때마다 용찬은 대책도 없으면서 자신이 다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말라고 고집을 꺾지 않았다. 용찬은 무조건 서울로, 서울로만 생각했다. 대처에 가서 부딪치며 큰물에서 놀아야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피부에 와 닿는 바람은 차가웠으나, 용찬의 마음은 이미 봄바람 꽃향기로 가득 찼다. 날아다니듯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 없었다. 그때 해연을 다시 만났다.

짐을 정리하러 자취방에 들렀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해연이 꽃다발을 들고 찾아왔다. 방학을 맞아 잠시 집에 내려왔는데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고3이 되는 해연은 화사한 분홍색 외투 때문인지 완연한 여인네 풍모를 드러냈다. 일기장을 불태운 이후, 해연의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고개를 여러 번 흔들며 부정했다. 그렇게 잊기로 마음 다잡았는데, 막상 해연이 생글생글 웃으며 퀴퀴한 방안에 꽃 냄새를 풍기니, 애틋하면서도 복잡스런 감정에 용찬의 마음은 헝클어졌다.

그런데 갑자기 환한 빛이 일더니 내면 깊숙한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 그건 할아버지, 아버지 때의 일이야. 나는 신시대를 살아갈 사람인데 조상들의 삶에 구속되어선 안 돼.'

술래가 숨어 있는 아이를 찾아낸 듯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인간은 합리화의 동물이란 걸 용찬은 그때 터득했다.

그런 속내를 모르는 해연은 용찬의 표정에서 느끼는 떨떠름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선수를 쳤다.

"오빠 우리 저녁 먹고 영화 구경 가요. 합격 축하 턱으로 내가 쏠게."



대룡반점으로 갔다. 공부 핑계로 한동안 뜸했던 곳이지만 변한 게 없어서 편안했다. 왕 사장은 인사하는 해연을 건성으로 쳐다보다가 용찬에게 시선을 돌렸다.

"대학교 합격해서 서울 간다며? 축하한다."

"아니 어떻게 아셨어요?"

"여기가 뉴스 보급소다. 학생들 입에서 권용찬, 권용찬 하는 소릴 듣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리화와 금산이에게도 알렸다. 아주 기뻐하더라."

왕 사장은 자기 자식 일처럼 기뻐하며 환하게 웃었다.



"오빠, 작년 선거 때 교회에 갔었지? 헌데, 예배도 끝나기 전에 왜 먼저 나갔어?"

작년 해연이 제주에 왔을 때, 용찬이 그녀를 만나기 위해 부산을 떨었던 일이 떠올랐다. 교회에 갔으나 해연을 볼 수 없었던 실망감에 예배시간은 아주 지루했고 목사님 설교에는 하품이 나왔다. 그래서 친구에게는 소변이 마렵다는 핑계를 대고 교회를 나와 버렸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

"난 위층 찬양대에 있었어. 교회에서 오빠를 보게 될 줄이야. 얼마나 기뻤는지. 노래를 부르면서도 오빠만 내려다 보았는 걸."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시간에 그렇게 분심이 들면 쓰나?"

용찬은 옹졸했던 행동을 들킨 게 부끄러운 듯 점잖게 타박했다. 그런 용찬의 속마음을 아는지 해연은 생글거리며 곱게 흘겼다.

"그날 아침에 찬양 대원이 부족하다고 지휘자 선생님이 교회 앞에서 선거운동하고 있던 나와 오빠를 끌고 갔어. 난 예배가 끝나기만 기다렸는데, 뒤만 돌아보던 오빠는 무슨 일인지 중간에 나가버리더라고. 얼마나 속상했는지."

"그때 친구가 하도 교회 가자는 바람에 마지못해 따라갔는데, 소변이 마려워 화장실을 찾느라 두리번거렸던 거야. 그래서 나왔는데 다시 들어가기도 뭐해서 그냥 집에 가 벼렸지."

용찬은 거짓말이 술술 나오는 게 신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애써 해연의 눈길을 피했다.

리화 어머니가 아니었으면 어색할 뻔했던 분위기가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짜장면에 시키지도 않은 탕수육까지 가지고 왔다.

"이건 사장님 서비스고, 오늘 밥값은 공짜야. 우리 리화 마음잡아서 공부 잘하는 게 선생님 잘 만난 덕분이잖아?"

"그러고 보니, 리화도 이제 고등학교 입시 준비해야겠네요?"

"좀 철이 들었는지 방학에도 내려오지 않고 학원 다니고 있어."

말을 하면서 리화 어머니는 주머니에서 흰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자 이건 합격 축하금. 서울 가면 돈 쓸 일도 많을 텐데 성의로 조금 담았으니 부담 갖지 말고 받아요."

용찬은 의례적으로 사양하다 해연의 부추김에 덥석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꽤 많은 액수였다.



"여자는 이상형을 꿈꾸다가도 막상 결혼할 때는 현실적이 된데요"
"해연이도 그럴 거야?"
"이다음에 제주 남자하고는 결혼하지 말래요"




브래드 피트가 나오는 '가을의 전설'이란 영화를 봤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일어난 막내의 약혼녀 수잔나와 두 형제의 이야기다. 세 형제가 전쟁에 참여했다가 막내는 죽고, 형은 불구가 됐고 둘째인 트리스탄은 온전한 모습으로 돌아온다. 트리스탄(브레드 피트)은 동생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으로 방황하다가 형이 수잔나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바다로 떠나버린다. 세 형제 사이를 방황하던 수잔나는 트리스탄을 사랑하지만, 그가 떠나자 형 알프레드와 결혼을 한다. 트리스탄이 돌아오자 수잔나는 방황을 하고 결국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살게 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자살에 이르는 내용이었다.

엔딩 자막이 올라가는데 해연이 손수건을 꺼내 눈언저리를 닦았다.



"그게 우리나라 상황에선 가능한가요? 남자만 사는 가정에 나타나서 세 형제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 말이에요?"

영화관을 나온 후, 빵집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 해연이 영화에 대한 감상을 얘기했다.

"그러니까 영화지. 그래도 브래드 피트가 제일 멋지지 않았어?"

"그런 터프한 개성 있는 성격의 주인공이라면 누가 연기하던 멋질걸요."

"난 여자 주인공이 마음에 안 들어. 지조가 없잖아. 브래드 피트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린다고 했으면 기다려야지. 마음에도 없는 거짓 편지 하나에 마음을 바꿔 형과 결혼할 수 있는 거야?"

"여자는 이상형을 꿈꾸다가도 막상 결혼할 때는 현실적이 된데요."

"해연이도 그럴 거야?"

"뭐가요?"

"사랑하는 사람 따로, 결혼하는 사람 따로?"

"피이, 학생한테 별 걸 다 묻네. 그건 상황에 따라 다르겠죠."

해연이 빵을 한 입 베어 물려다 용찬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

"왜?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그러자 해연이 장난기가 잔뜩 묻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니요. 우리 이모가 한 말이 생각나서요."

"무슨 말?"

"이다음에 제주 남자하고는 결혼하지 말래요."

"헐!"



<강준 작가 joon44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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