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자존, 한라산을 말하다](12)제2부 한라산의 인문학-⑤한라산과 4·3

[제주의 자존, 한라산을 말하다](12)제2부 한라산의 인문학-⑤한라산과 4·3
한라산이 품은 4·3 진실… 선입견 버리고 들여다 봐야
  • 입력 : 2016. 09.05(월) 00:00
  • 김지은 기자 jieun@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하늘에서 바라본 어승생오름 전경. 4·3 봉기 이후 유격대 지도부는 한라산 어승생오름 일대에 거점을 마련했다. 사진=한라일보 DB

[전문가 리포트]박찬식 제주발전연구원 제주학연구센터장

무장봉기 주체인 한라산유격대
실상에 대한 자세한 기록 부족
성격 밝히는 부단한 작업 필요
구술자료 등 실마리 발견 가능

박찬식 센터장

한라산과 4·3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유격대가 봉기·주둔했던 거점이며, 유격대와 토벌대 간 무력충돌이 전개된 곳이며, 토벌대의 무력진압을 피해 주민들이 숨었던 피신처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라산 곳곳에서 벌어졌던 4·3에 연관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진실로 기록되지 못하고 있다. 이념적 잣대에 의해 한라산은 군경의 진압대상지이며, 그곳에 거처하던 사람들은 '빨갱이'로 취급되던 과거 기억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선입견을 벗고서 한라산이 품은 4·3을 진실대로, 과거 사람들의 마음속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2003년 발간된 정부 위원회의 '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는 많은 자료에 대한 검토·분석의 결과물이지만, 아직까지도 무장봉기의 주체인 한라산 유격대(무장대)의 실상에 대해서 알려주는 내용이 부족하다. 사건의 진실에 더 다가가기 위해서 4·3 당시 산으로 올라간 유격대의 성격을 밝히는 작업이 필요하다. 한라산 유격대와 관련된 미국측 자료, 행형자료, 구술자료 등을 중심으로 그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

4·3 봉기 이후 유격대 지도부는 한라산 어승생오름 일대에 거점을 마련했다. 국방경비대 제9연대 고문관 찰스 웨슬로스키의 1948년 7월 21일의 보고에 의하면 '약 150여 명의 폭도들이 어승생악 부근에서 훈련을 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어승생악 인근에는 넓은 초지를 이룬 분지가 있고, 특히 일제강점기 일본군 58군단 사령부가 미로처럼 동굴진지를 구축해 최후의 거점으로 삼으려 했었던 곳이다. 이 밖에 유격대의 훈련장은 오림반(신례리)과 물장오리·태역장오리 인근이었다.

한라산 유격대는 5·10 선거에 대한 적극적인 거부투쟁을 전개했다. 유격대는 선거를 보이콧 하는 방법으로 주민들을 산으로 올려 보냈다. 주민들의 산행은 5월 5일경부터 시작됐다. 주민들이 마을 인근의 오름이나 숲으로 가서 머물다 선거가 끝난 후에야 마을로 돌아왔다. 예컨대 연동리 주민들은 '남조순오름'으로, 하귀리 주민들은 광령리 '이승굴'에 입산했다. 입산 지역은 거주지 마을에서 한라산 쪽으로 5㎞ 내외 거리의 오름을 선택했다.

10월 17일 9연대 송요찬 연대장은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이때로부터 전개된 중산간마을 초토화 강경진압작전에 의해 이듬해 봄까지 수많은 주민 집단 희생이 있었다.

5·10선거 때 한라산에 입산했다가 내려오는 주민들. 주민들은 거주지에서 한라산 쪽으로 5㎞ 내외 거리의 오름을 선택해 머물렀다.

1949년 초 육군 제2연대는 한라산 주둔 유격대에 대한 전면 공격을 시도했다. 제1대대가 '벵디친밧'(5·16도로 수악교 부근), 제2대대가 관음사, 제3대대가 교래리, 특수부대는 노루오름(조천면)에 주둔하면서 작전을 펼쳤다. 미군 정보일지의 1949년 3월 말 보고에는 유격대 위치가 '영림소(교래리 검은오름 주변), 성판악, 평지(한라산 돈내코 등반코스의 평지대피소 부근), 돌오름이며, 훈련소는 '물장오리' 인근에 있으며, 도당 사령부는 제주읍 삼의악 주변(관음사 일대)이라 파악했다. 1949년 2월 12일 유격대 근거지인 관음사가 토벌대에 의해 소각됐으며, 이때부터 토벌대의 주둔지로 바뀌었다.

1948년 11월 이후 제주도의 중산간 마을 주민들은 토벌대의 초토화에 따라 한라산으로 피난길에 나서야 했다. 해안마을로 피난 갔던 주민들도 '도피자가족'으로 몰려서 위험에 처하게 되자 입산해 버렸다. 한라산으로 피난지를 정한 주민들은 초기에는 불타버린 집을 의지해 움막을 지어 생활하다가 토벌이 강화되자 마을 인근 야산으로 밀려나고, 1949년 1~2월경에는 한라산 중심부와 가까운 깊숙한 산간으로 피해 들어갔다. '열안지오름' 인근 '비남도', '가미왓', 관음사 인근, '바농오름' 일대, '대나오름'과 '거친오름' 일대의 '머흘뿔', '못밧', '샛머흘', '명도암오름', '물장오리', '물영아리오름' 일대, '한수기곶' 등 한라산을 포함한 인근의 모든 산야가 주민피신처였다.

1949년 초 한라산에는 유격대뿐만 아니라 2만여 명에 달하는 중산간지역 거주 민간인들이 피신해 있었다. 이들은 제9연대의 무리한 소개작전을 피해 생존을 위해 피신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선무공작에 따라 속속 하산해 왔다.

한라산 곳곳에는 4·3의 아픈 역사 오롯이

무장대 훈련장·근거지로 사용
주민들 살기위해 산으로 피신
1954년 한라산 입산 금지 풀려


"한라산 4·3 유적의 범위는 방대하다. 한라산 거의 모든 곳이 4·3 유적이 될 수 있다. 언제 어디서 죽었을지 모를 수많은 무장대의 뼈가 묻힌 곳도 한라산 자락이고, 고단한 피난 생활 속에 기아로 죽어간 노인들과 아이들도 한라산을 벗 삼고 있을 것이다."

신선부대가 1954년 한라산 입산금지 해제를 기념해 세운 '한라산 개방 평화기념비'. 백록담 인근 북쪽 능선에 남아 있다. 사진=한라일보 DB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가 2006년 펴낸 '한라산총서Ⅲ- 한라산의 역사·유적'에 당시 제주4·3연구소 연구원이던 장윤식씨는 이렇게 썼다. 그의 말처럼 제주섬을 뒤흔든 4·3의 역사는 한라산 곳곳에 아픔으로 남았다.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어두웠던 과거는 한라산에 보이지 않는 금을 쳤다. 4·3이 진행 중이던 1948년 10월17일 해안으로부터 5㎞ 이상 벗어난 지역으로 통행하는 일이 전면 금지되면서다. 이는 한라산으로 가는 발길을 철저히 묶어 놓았다.

한라산에는 4·3의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남았다. 한라산총서Ⅲ에 실린 장 연구원의 글에 따르면 한라산은 무장대의 훈련장, 근거지이자 이들을 쫓는 토벌대의 주둔지였고, 주민들의 피난처이기도 했다. 갑자기 몰아닥친 역사의 소용돌이 앞에서 한라산 안에서의 제주 사람들의 삶은 세차게 흔들렸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 한라산을 올랐다. 중산간 지역 주민들은 1948년 11월 이후 토벌대의 초토화작전으로 인해 피난길에 나섰다. 해안 마을로 내려가라는 토벌대의 명령을 전달 받지 못했거나 토벌대가 느닷없이 들이닥쳐 급히 산으로 몸을 숨긴 이들도 있었다. 주민들은 토벌이 강화되면서 한라산과 가까운 깊숙한 산간으로 쫓겨났다.

4·3이 끝을 보이던 1954년, 8년간 이어졌던 한라산 입산 금지령이 풀렸다. 이를 기념해 한라산 백록담 인근 북쪽 능선에 '한라산 개방 평화기념비'가 세워졌다. 기념비는 남았지만 4·3 발생 70주년을 앞둔 지금도 한라산 내 4·3유적에 대한 조사 작업은 극히 일부에 그치고 있다.

박찬식 제주발전연구원 제주학연구센터장은 "4·3연구소가 답사를 통해 이덕구 산전, 한수기곶 등을 증언으로 확인한 바 있지만 여전히 일부만 조사돼 있다"며 "한라산이 (4·3 당시) 유격대의 본거지이다 보니 이념적으로 생각해 꺼리는 게 있지만 역사적 진실을 파악하기 위한 일이 될 수 있다"고 했다.

특별취재팀= 강시영 선임기자·강경민·김지은·김희동천·채해원·강경태·강동민기자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4382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