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마른꽃들이 지나갔다
절망이 내 이름을 부르며 달려올 때
송당리 아부오름으로 차를 몬다 거기,
나만큼 너를 모르는 사람이 있다
두 개의 심장이 척척한 공기에 둘러싸여
삼나무 아래를 지나는 꿈을 꾼다
잎으로만 살던 시절을 내려놓고
다시 네 생일이라고 잔뜩 미역을 불리고
수위를 넘긴 바다가 창문을 엿볼 때
젊어서 뼈를 묻은 억새들
가시를 기다리다 지쳐 오름이 되었겠지만
(중략)
영원히 나를 껴안을 수 없는 사람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
마른 꽃들이 흔들렸다 신발 뒤축으로

삽화=배수연
시는 제주 오름(굼부리)을 배경으로 상실과 그리움뿐 아니라 자신과의 불화를 아주 조용한 방식으로 밀고 간다. 특히 첫 구절과 마지막 구절의 호응으로 화자의 걸음은 끝난 게 아니라 기억 속에서 계속 움직인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오름은 절망을 피하는 곳이 아니라, 절망과 함께 도착하는 길 끝에 있다. 그리하여 오름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젊어서 뼈를 묻은" 존재, 혹은 말을 하지 않는 타자를 지시하고, 결국 시인은 제주의 지형을 내면의 지형으로 바꿔놓으며, 제주를 통해 사랑 이후의 인간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어쩌면 "나만큼 너를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문장이 이 시 전체의 중심일 것이다. 우리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가장 모르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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