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연 마지막 장에서 출연진과 관객이 서우젯소리를 따라 한데 어우러진 모습. (사)마로가 새로운 시도를 담았다는 공연 '바람 푸다시'는 관객의 참여로 신명의 바람을 일으켰다. (사)마로 제공
[한라일보] 한 줄기 빛이 적막한 무대를 깨운다. 희고 긴 장삼 자락을 날리는 여성의 몸짓이 지나간 공간에는 이내 천둥 번개가 몰아친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듯 그 속을 슬피 헤매는 소녀를 감싸안는 것은 인생이 늘 봄날일 수는 없다는 따뜻한 목소리다. "그렇게 울어도 된단다. 지금의 눈물도 까맣게 탄 마음을 씻어줄 거란다."
사단법인 마로가 새 시도를 담았다는 공연 '바람 푸다시'는 '바람의 신' 영등신의 목소리로 새로운 여정의 문을 연다. 2024 지역 대표예술단체로 선정된 제주 전통예술단체 (사)마로가 제주콘텐츠진흥원의 블랙박스 공연장 Be IN;(비인)과 공동 기획한 작품이다. 지난 20일 첫 공연을 시작으로 23일까지 모두 6번의 무대로 관객을 만나고 있다. 토요일이었던 지난 22일 오후 3시 공연은 빈자리가 거의 없을 만큼 객석을 채우고 막을 올렸다.
영등신의 목소리가 그친 자리에는 소리꾼의 노래가 바람처럼 일어난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라는 구슬픈 음성은 슬픔 한 곳에 멈추지 않고 유유히 흐른다. (사)마로 단원들의 사물타악과 피아노의 합주가 거대가 바람을 일으키듯 휘몰아치자 소리꾼의 가락에도 봄꽃이 피어난다. 우리 국악 아리랑을 '바람의 섬' 제주에 맞춰 개사한 소리가 길을 트듯이 '바람 푸다시', '신명의 바람', '서우젯소리' 등 공연의 마지막 장까지 슬픔을 흥으로 승화하며 연결한다.

관객이 직접 참여한 서순실 큰심방의 푸다시 의식. (사)마로 제공
공연의 모티브가 된 것은 무속신앙인 제주의 굿이다. 그 이름 '바람 푸다시'의 '푸다시'는 제주 굿에서 가장 마지막에 행해지는 의례를 말한다. (사)마로의 예고대로 특별출연으로 무대에 오른 서순실 큰심방은 무구인 지전을 흔들고 새도림(큰굿을 할 때 사귀(邪鬼)를 내쫓기 위해 행하는 제차의 하나)을 부르며 관객을 위한 푸다시 의식을 하기도 했다. 마로 단원들의 안내를 받아 무대에 앉은 관객들은 그 의식을 함께하며 다시금 소망을 빌었고, 공연 시작 전에 관객들이 적어 낸 소원지는 미디어아트를 통해 공연장 화면에 등불처럼 떠올랐다.
관객들의 참여는 공연 막바지에 극대화됐다. 제주의 무가인 '서우젯소리'에 맞춰 출연진과 관객이 한데 어우러지는 향연은 공연의 하이라이트였다. "공연의 핵심은 관객의 참여"라는 (사)마로의 설명처럼 모두가 함께하는 무대가 더 큰 신명의 바람을 일으키며 서로의 마음을 씻어줬다.

공연 4장 '신명의 바람'에서 펼쳐지는 사물타악과 소고춤의 무대. (사)마로 제공

(사)마로의 새 공연 '바람 푸다시'는 사물타악, 전통 춤, 미디어아트 등을 융복합하며 제주의 전통 굿 의례를 현대적으로 풀어냈다. (사)마로 제공
1시간여의 공연을 장식한 사물타악과 전통 춤·노래, 미디어아트의 합주는 낯섦 없이 조화로웠다. 깊은 슬픔에서 신명의 길로 빠져나오는 몸짓과 가락의 변주를 따라 시시각각 바뀌는 미디어아트가 극의 분위기를 고조했다. 천둥 번개가 쳤다가 기메(종이로 만든 무구)가 휘날리기도 하고, 샛노란 유채꽃을 흩뿌리기도 했다. 미디어아트라는 옷을 입은 극의 공간은 지상에서 저 머나먼 우주, 별나라까지 뻗어가기도 했다.
제주 굿의 의례를 소재로 삼고 재해석한 만큼 각 장에 설명 요소가 더해졌으면 어땠을까 하는 것은 작은 아쉬움이다. 팸플릿의 공연 소개를 곱씹고 나서야 장면 간의 이해가 좀 더 또렷해져서다. 하지만 이런 아쉬움이 큰 방해가 되지 않았던 것은 마음만으로 느껴도 되는 무대였기 때문이다. 다소 생소하고 난해할 수 있는 전통 굿을 위로, 용기라는 메시지로 단순화하며 누구나 무리 없이 따를 수 있도록 했다.
2005년 창단해 올해로 20년째 이어진 (사)마로의 무대는 그야말로 농익었다. 관객을 들었다 놓는 사물타악의 울림과 그들의 몸짓에 객석에선 연신 박수를 보냈다. 새로운 시도를 넘은 마로의 또 다른 도전이 궁금해졌다.
공연은 (사)마로의 대표이기도 한 양호성이 연출했다. 마로의 양호성과 오유정, 장문선, 박준하(춤)가 타악을 맡았으며, 백정현(피아노), 박수현(춤), 서의철(소리), 송예슬(해금), 양수원(춤)이 출연했다.

공연 '바람 푸다시'의 객석을 채운 관객들. (사)마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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