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역사현장 일제전적지를 가다](149)제주·일본 제4차 해외비교-(4)타치아라이 기념관과 가미가제

[고난의 역사현장 일제전적지를 가다](149)제주·일본 제4차 해외비교-(4)타치아라이 기념관과 가미가제
전쟁 동원 자살특공대원 죽음 미화·세계유산 등재 추진
  • 입력 : 2014. 03.12(수) 00:00
  • 이윤형 기자 yhlee@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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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객들로 북적이는 타치아라이 평화기념관. 이승철기자

피해사실만 강조 아시아 각국에 끼친 고통 외면
2015년 세계기록유산 등재 계획에 주변국 반발


태평양전쟁에서 가장 충격적인 무기 가운데 하나는 가미가제(kamikaze) 자살특공대일 것이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전으로 기울기 시작하자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17~20세 전후의 젊은이들을 인간탄환으로 동원한 것이 바로 가미가제 자살특공대다.

일본의 태평양전쟁 관련 기념관 등에서는 대부분 가미가제와 관련된 내용들을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전쟁을 미화하고 일본의 겪은 피해와 고통을 부각시킨다. 일본이 일으킨 침략전쟁으로 인해 한반도를 비롯한 아시아 각국에 끼친 고통은 애써 외면한다. 침략의 가해국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피해자라는 사실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다.

후쿠오카현에 있는 타치아라이(大刀洗) 평화기념관도 예외일 수는 없다. 특히 타치아라이는 태평양전쟁 시기 동양 제일로 불린 비행장과 비행학교 등 관련시설이 집중됐던 곳이다. 이곳 기념관의 해설사는 "일본 육군 비행사의 약 3분의 2가 타치아라이에서 교육받고 훈련을 받아 조종사로 양성됐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일본 육군비행대의 심장부라고 할 만한 곳이 바로 타치아라이 비행장이었다. 타치아라이 비행장의 활주로는 콘크리트가 아니라 풀밭으로 조성됐다. 때문에 지금은 흔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타치아라이 비행장은 1945년에 들어서면서 가미가제 자살특공대의 산실로 바뀐다. 이곳을 중심으로 양성한 스무 살 안팎의 청년들은 가미가제 대원으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타치아라이 평화기념관은 가미가제 대원들의 무모한 희생을 사진 등 각종 자료들을 동원해서 보여주고 있다. 기념관은 비행기 격납고를 모티프로 하고 있다.

내부로 들어서면 이곳에서 생산했던 비행기 등 무기류와 비행장 관련시설 및 항공기술을 소개하고 있다. 일본에 현재 한 대뿐인 97식 전투기와 제로센 32형의 실제 전투기도 볼 수 있다. 가미가제 및 비행기 등을 중심으로 전시가 이뤄지면서 학생을 비롯 방문객들로 북적인다.

이곳에 전시중인 97식 전투기는 1996년 후쿠오카의 하카다만 바다 속에서 건져 올린 것을 복원해놓은 것이다. 이 전투기는 1940년대 일본 육군의 주력전투기이자 최초의 단엽전투기이다. 1938년 처음 실전 배치돼 '하늘의 저격병'이라 불릴 정도로 성능을 인정받았다.

▲타치아라이 기념관 내부에 전시중인 97식 전투기.

태평양전쟁 말기에 97식 전투기는 가미가제 특공용으로 전환된다. 비행학교에 배속된 초보비행사들이 조작이 용이한 97식 전투기를 타고 출격에 나서곤 했다. 하지만 오래된 기체 탓에 고장이 잦았다. 또한 출격을 할 수 없는 상태도 자주 발생했다. 특공작전에 나섰다가 살아 돌아온 가미가제 대원들은 기체관리 소홀로 격리 처분됐다고 한다. 천장에는 미 B-29폭격기를 철골로 만들어 매달아 전시해놓고 있다. 가미가제 특공대가 출격해서 B-29와 충돌 격추시키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기념관 내부는 일본 각지에서 온 수학여행단으로 들어찼다. 이들에게 당시 가미가제 특공대원들의 희생은 어떻게 비춰졌을까.

타치아라이 비행장은 우리나라와도 연관이 있다. 바로 타치아라이 비행학교 분교 4곳이 한반도에도 설치된 것이다. 일제는 한반도에서의 조종사 양성 등을 위해 서울 여의도와 군산, 대전, 대구 등지에 타치아라이 비행학교 분교 4곳을 설치했다. 이들 대부분은 일본의 패전 후에 미군 비행장으로 바뀌고 미군이 주둔하게 된다.

▲우리나라에 설치된 비행학교 분교. 경성·대전·대구·군산이 표시돼있다.

타치아라이 비행학교는 일본 패망전까지 모두 18개 분교가 있었다고 한다. 가미가제 특공대원를 양성한 산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타치아라이비행학교 분교 중에는 지란 비행학교도 있었다. 지란 비행학교는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패전으로 기울기 시작하자 일반 비행학교가 아니라 가미가제 특공비행장으로 역할이 바뀐다. 오키나와로 출격하는 가미가제 조종사의 출격기지로 바뀌는 것이다. 여기서 양성한 특공대원들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오키나와로 출격했다.

오늘날 지란비행학교는 사라지고 그 일대에는 지란특공평화회관이 들어섰다. 내부에는 가미가제 자살특공대원들의 편지와 사진 등을 빼곡하게 전시해놓고 있다. 회관측은 특공대원 1460명을 위령한다고 하면서 가미가제로 출격했다 죽어간 이들의 죽음을 기념하고 찬양하는 등 전쟁을 미화하고 있다.

▲지란특공평화회관 전경.

이 가운데는 1945년 5월11일 아침 가미가제로 출격했다 사망한 경남 사천 출신 탁경현을 비롯 한국출신 10여명(표에는 11명, 터치스크린에는 16명으로 소개)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지란 특공평화회관을 관리하고 있는 가고시마현 미나미큐슈시는 지난달 회관측의 소장 자료를 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를 추진하겠다고 밝혀 우리나라를 비롯 주변국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특공대원들의 유서와 편지 등 1만4000여점 중 본인 이름이 확인된 333점을 '지란으로부터의 편지'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등재를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더욱이 회관측은 333점만 매스컴에 알리고 있을 뿐 그것이 일본이나 한국 누구의 것인지, 출처 등은 알려주지 않고 있다. 한국인 수 천 명을 강제동원한 현장인 하시마(일명 군함도)탄광을 2015년까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겠다고 밝힌 것과 같은 맥락이다.

침략전쟁의 도구로 내몰린 가미가제 자살특공대원들의 죽음을 찬양하는 것도 모자라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겠다는 발상 앞에 일본 제국주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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