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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觀] 마음은 잘 다녀왔습니다
최다훈 기자 orca@ihalla.com
입력 : 2021. 04.16.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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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소울'.

얼마 전 쌀국숫집에서 급하게 저녁 식사를 했다. 일교차가 크던 봄날이었고 뜨거운 국물이 좀 필요했다. 보려고 했던 영화의 러닝 타임에 맞춰서 극장 근처에서 빨리 먹을 수 있는 음식점을 찾다가 고른 음식이 쌀국수였다. 뜨겁고, 빨리 나오는. 본격적인 식사 시간 전이라 한산한 식당에 혼자 앉아 음식이 나올 때까지의 몇 분간을 이국적인 향취에 조금은 취했던 것 같다. 마스크를 단단히 쓰고 있었지만 후각보다 먼저 발동한 감각들이 있었다. 세상에 쌀국숫집에만 와도 동남아가 이렇게 가고 싶다니. 아니 언제 다시 이 마스크를 벗고 동남아 여행을 갈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예상대로 금세 음식이 나왔다. 싱싱한 빛깔의 레몬과 고수, 통통한 숙주를 뜨거운 김이 나는 국수 그릇 안에 가득 넣으면서 이국을 향한 마음은 더 간절해졌다. 와 고수다, 세상에 숙주야! 이런… 레몬을 보니 왜 맥주 생각이 날까 같은. 얼른 뜨거운 국물을 떠서 입 안을 가득 채우고 몸속으로 흘려 들여보낸 다음 본격적으로 쌀국수를 먹다가 그만 눈까지 스르륵 감아 버렸다. 너무 맛있고 너무 가고 싶다. 한 그릇을 비우는 내내 남국에서 보냈던 어떤 순간들이 앞다투어 떠올랐다. 노천에서 마시던 달고 진한 커피, 기다란 나무 막대에 꽂힌 과일, 냉장고에서 차가운 땀을 흘리던 커다란 병맥주, 느리게 걸어 그늘로 향하던 고양이, 신기할 정도로 푸르고 숱이 많던 나무의 모양들 그리고 걷다 보면 턱 하니 나타나는 동네 개천 같은 바다의 등장. 그 비현실적인 감각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더 재미있는 건 남국을 삼키고 난 후였다.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서 앞을 보니 가게 한 곳에 여행 잡지 '론리 플래닛'이 비치돼 있었다. 뭔가 표지가 익숙해서 찬찬히 들여다보니 거기엔 호주의 사막, 에어즈 락의 모습이 가득했다. 울룰루, 세상의 중심이라는 붉은 사막의 돌산. 나는 그곳에 오른 적이 있었다. 20년 전쯤 나는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가지고 일하던 붉은 사막의 단기 호텔리어였다. 어쩌다 마주친 우연에 살짝 신이 나며 웃음이 나왔다. 한 끼를 때우고자 들른 식당에서 나는 벌써 몇 개국을 여행하고 있는 것인가! 지나간 시간들이 갑자기 번쩍번쩍 손을 드는데 무척 반가운 한 편 아득하고 어둑한 마음에 조금 슬프기도 했다. 후자의 마음은 당연히 이 마스크는 언제 추억이 될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계산을 하며 내 사연을 좀 팔았고 그 덕에 감사하게도 그 여행 잡지를 가게 사장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았다. 오래 쌓인 먼지를 잘 닦아 가방에 고이 넣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를테면 쌀국수 트립의 태국 수베니어, 호주 어매니티 같은 것이었다. 소중했다.

 이제는 모든 영화를 볼 때마다 어딘가로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든다. 다녀온 곳은 그것대로 못 가 본 곳은 또 그것대로 반갑고 새로운, 두 마음 모두 그리움과 설렘을 동반하고 있다. '다시 가고 싶다'와 '한 번 가 보고 싶다'의 마음을 가득 안고 이제는 극장에서 '티켓팅'이라는 동음 이의어의 순간들을 새롭게 마주한다. 마스크를 쓰고 극장으로 들어가 불이 꺼지고 스크린이 환해질 때 언뜻 상공의 구름이 눈 앞으로 끼어드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스크린 속 낯선 인물들을 만날 때 여행이 가르쳐 준 인사의 자세를 갖추기도 했다. 여행이 끝나는 것처럼, 엔딩 크레딧이 다 오른 후에는 벅참과 아쉬움이 동시에 와락 밀려오기도 했고 돌아가는 길의 익숙한 동선에서는 안도를 느꼈지만 자꾸 뒤돌아 보고 싶음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한 편의 영화와 한 번의 여행은 그렇게 꽤 많이 닮아 있었다.

 쌀국수로 시작된 여행을 떠난 날과 그 다음날 연이어 두 편의 영화로 여행을 다녀왔다. 뉴욕과 하코다테를 일박 이일로 다녀왔는데 각기 다른 서울의 극장에서 영화 '소울'과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를 관람한 것이다. 일박 이일이 지나고 나니 두 작품 안에 각각 담긴 인생이라는 긴 시간과 청춘이라는 한 자락의 시간 또한 여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보면서는 여행으로 가 보지 못한 두 도시를 가능한 많이 느껴 보려고, 영화가 주는 우연의 순간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뉴욕은 가보지 못했지만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고 하코다테에 가보진 못했지만 훗카이도에 간 적은 있었다. 경험치에 더해지는 어떤 새로운 감각들을 공들여 마주하면서 언젠가 다시 음미할 풍미들을 마음에 챙겨 넣었다. 뉴욕에 가면 피자를 먹고 재즈 클럽에 가봐야지, 하코다테에 가면 서점에서 책을 한 권 사고, 편의점에서 비닐우산을 하나 사야지 같은 여행의 버킷 리스트들을 적어 보는 건 덤이었다. 그러고 보니 마음은 이미 다녀온 것 같이 흡족했다. '소울'을 보고 나서는 핸드폰 속 고양이 사진을 쓰다듬었고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를 보고 나서는 10여년 전 훗카이도의 추억들을 더듬어 보았다. 그러고 나니 금세 '내 어깨 위 고양이 밥' 속 런던과 '러브레터' 속 훗카이도에도 다녀올 수 있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영화가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 추억이 있어 감사하다는 생각으로 가만히 마음 위로 두 손을 모았다. 그 콩닥이는 마음 안에는 물리적 제약이, 사회적 거리 두기가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나의 작고 위대한 과거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 나를 이리저리 보내주고 있길래 덜컥 예약도 없이 그 일등석에 앉아 끊임없이 룸 서비스를 시켜 먹은 한 밤의 호사스럽고 비밀스러운 여행이었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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