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언어의 갈라파고스 32] 2부 한라산-(28)부악

[제주도, 언어의 갈라파고스 32] 2부 한라산-(28)부악
여러 나라서 '가마솥' 뜻하는 분화구 山 이름 찾기 힘들어
  • 입력 : 2023. 03.14(화) 00:00  수정 : 2023. 03. 14(화) 14:40
  • 김채현 기자 hakch@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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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우리마다 가마솥처럼 생겨


한라산을 부악(釜岳)이라고도 한다는 설명은 여러 고전에 나온다. 대체로 정상에 못이 있어 물을 담는 그릇 같아 붙여진 명칭이라고 설명한다.

산봉우리가 모두 다 오목하여 가마솥과 같이 움푹하여 진창을 이룬다. 모든 봉우리가 다 그러하므로 두무악이라 한다. 충암선생집 권4 '제주풍토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지금부터 약 501년 전 기록이다.

1653년 이원진이 저술한 '탐라지'에 다음과 같이 설명한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거의 무비판적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한편으로 가메오름이라고도 하는데, 산봉우리에 못이 있어서 물을 저장하는 그릇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후의 기록들은 위의 '제주풍토록'과 '탐라지'를 많이 참고하여 쓴 탓으로 비슷하게 기술한 것을 볼 수 있다.

1689년(숙종 15)에 간행한 허목의 '기언 탐라지'에는 "두무악은 한라산의 별명이며 부악(釜嶽)이라고도 한다. 주의 남쪽 20리에는 여러 개의 산봉우리가 있으며 봉 위에는 깊은 못이 있는데 지세가 넓고 평평하다. 그래서 두무악이라 한 것이다. 그곳 꼭대기에 백록홍(白鹿泓)이 있는데 춘분과 추분의 초저녁에 남극 노인성이 보인다."

1704년 이형상이 제주도와 주변 도서의 자연·역사·산물·풍속·방어 등을 기록한 책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백록담이 솥 같아 부악이라 했다?


"부악이라고도 하는데, 정상에 연못이 있어 마치 솥과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백록담을 솥(釜)과 같다고 직설적으로 비교한 글은 이게 처음이 아닌가 한다. 이분은 한라산 정상에 올라 바라본 감상을 다음과 같이 남겼다. "여기서부터는 산길이 더욱 험해져서 걸음걸음이 위험하였다. 견여(肩輿)에 부축되어 밀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갔다. 또 10여 리에 이르니 정상이었다. 남에게 이끌리며 지팡이를 짚으며 비틀비틀 올라 바라보니, 커다란 솥 하나가 '함몰된 정상에 연못이 있어 보이는 것이 이와 같았다.' 큰 바다 가운데 높이 지탱하고 있었다. 흙은 검붉은 빛이었고, 벽은 불에 탄 것과 같았다." 민속자연사박물관이 펴낸 '남환박물' 번역본에 나오는 내용이다. 형태도 움푹 파인 데다가 그 가운데엔 물이 고이기까지 했으니 솥처럼 보였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흙은 검붉은 빛이었고, 벽은 불에 탄 것과 같았으니 얼마나 솥처럼 보였을까? 여기에 더해 이름 부악(釜岳)이 갖는 연상까지 겹쳤으니 영락없는 솥오름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견여란 큰 상여를 쓰는 행상(行喪)에서, 좁은 길을 지날 때 임시로 쓰는 간단한 상여를 말한다. 아마 이분은 정상을 오를 때 들것을 타고 오른 모양이다.

이처럼 솥을 닮았다느니, 물을 담는 그릇과 같다고 표현했다. 이런 기록들은 한라산 정상이 실제 움푹 팬 지형으로 솥과 비슷하기 때문일 수 있다. 특히 그 이름을 부악(釜岳) 즉 가메오름이라고 한다는 데서 오는 유추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오늘날 부악을 가마솥과 같아 붙여진 이름이라는 걸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이런 설명을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예컨대, 이런 내용을 모른 채 한라산 정상에서 백록담을 바라보면서 가마솥을 연상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백두산 천지를 비롯해 분화구를 갖는 산은 우리나라나 일본 혹은 그 외 여러 나라에 많지만, 가마솥을 의미하는 이름은 찾아보기 힘들다. 백두산 천지에 대해 수많은 이름이 기록으로 남아 있지만, 솥과 연관 지어 붙여진 이름은 없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가마오름의 가마는 '솥'일까?


그렇다면 이 가마오름 혹은 가메오름이란 무슨 뜻일까? 이 역시 한자가 들어오기 전 살았던 고대인들은 '가마'라 부르고, 한자문화권이 유입하면서 '부악'이라고 쓴 건 아닐까? 그렇다면 '가마 부(釜)'의 한자 뜻은 버리고 '가마'라고 하는 음만 취했을 것이다.

이런 방식의 표기를 훈가자라 한다. 이렇게 '부악(釜岳)'이라고 쓴 사람은 '부악'이라고 읽지 말고 '가마오름'이라고 읽으라는 취지로 쓰는 것이다. 이 '가마'는 세월이 흐르면서 '가메 혹은 가매'로도 변형했을 것이다. 어쩌면 '가메'가 먼저 생긴 다음 '가마'로 변했을 수도 있다. 이게 무슨 뜻인가?

가마가 됐던 가메 혹은 가매가 됐던 이 말은 뜻이 여러 가지다. 우선 가마솥을 지칭한다. 가마솥이란 가마와 솥의 합성어로 각각이 별개의 어휘로 쓰기도 하고 이렇게 합성어로도 쓰지만 뜻은 같다. 1608년(선조 41)에 간행한 의서 '언해두창집요'에는 '죠롱박 너출을 가매에 담고'라고 하여 '가매'로 풀고 있다. 1632년(인조 11)에 간행한 '중간두시언해'에는 '불근 약대의 고기랄 프른 가매에 살마 내오'라 하여 '가매'라 했다.

가마로 읽는 용례도 있다. 조선 현종(1659~1674) 때 간행한 중국어학습서 노걸대언해에 '네 블 ㅅ디더 가매 ㅅ글커든', '붌디더 가매 덥거든'이라고 읽어 '가마'로 읽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는 가매로 표기하긴 했으나 가마+주격조사 ㅣ의 형태이므로 가마로 읽은 사례가 된다.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

1527년(중종 22) 펴낸 한자교학서 '훈몽자회'에는 가마 부(釜), 가마 와(鍋), 가마 심(鬵), 가마 긔(錡)로 가르친다.

한자어가 아닌 순 한글로만 사용한 사례도 있다. 1447년(세종 29)에 간행한 '석보상절'에는 '기름 부은 가마에 녀코'라는 구절이 나온다. 1459년(세조 5)에 간행한 '월인석보'에는 '죄인알 글난 가마애 드리티 나니라'가 나온다. 가마 혹은 솥은 생활필수품일 뿐만 아니라 용도와 형태도 다양하여 각각을 지시하는 한자도 이처럼 다양하다.

다음으로는 탈것의 한 종류가 있고, 숯이나 도자기·기와·벽돌 따위를 구워내는 시설로써의 가마가 있는 것이다. '사람의 머리나 일부 짐승의 대가리에 털이 한곳을 중심으로 빙 돌아나 소용돌이 모양으로 된 부분', '정수리'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 중에 부악 즉, 가마오름 혹은 가메오름은 어느 뜻으로 쓴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뜻이 숨어있는 건 아닐까?

한라산 백록담 전경(사진 왼쪽)과 몽골 보그트칸올에 있는 만주쉬르 사원터의 가마솥. 이 사원은 18세기 초반에 창건됐으며, 한창 번성기에는 승려가 1000명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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