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루'는 짐승이 아니다
[한라일보] 제주시 연동 해발 612.2m에 노리손이라는 오름이 있다. 자체높이 136m다. 1653년 탐라지에 노로객악(勞老客岳)으로 표기했다.

노리손이, 연동에 있으며, 노로순이, 노루생이, 노리오름라고도 한다. 김찬수
장손(獐遜), 장손악(獐遜岳) 등으로 표기한 책도 있다. 제주시의 옛 지명이라는 책에는 '노로-순이'를 표제어로 하고, 노리생이, 노리-오름, 장악(獐岳)을 동의어로 했다. 이와 함께 이 오름에 '노루가 많이 산다'면서 '노로순이'는 '장악, 노리(노루)오름'이라고 했다. 제주의 오름이란 책에는 노루생이, 노리오름이라는 지명으로도 기록했다.
지금까지 기록과 채록을 보면 노로순이, 노리손이, 노루생이, 노리오름, 노로객(勞老客), 노로객악(勞老客岳), 장손(獐遜), 장손악(獐孫岳), 장악(獐岳) 등 9가지다. 여기에서 순우리말로 되어 있는 지명은 노로순이, 노리손이, 노루생이, 노리오름 등 4가지다.
이 지명들에서 보이는 '노로', '노리', '노루'가 지시하는 것은 무엇인가? 또 '-순이', '-손이', '-생이'는 무얼 말하는가가 쟁점이 된다. 이 지명을 설명한 저자들은 예외 없이 짐승 '노루'라고 했다. 이런 해석은 지역 일반은 물론 언론인, 전문가 등 모두 똑같다. "'노리'는 노루의 제주방언, '손'은 '쏜(射·소다=쏘다)'의 옛말로 노루가 많아서 옛날부터 노루사냥으로 이름났던 오름에서 연유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러한 설명은 김종철의 1995년 오름 나그네 이후 표현에 다소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거의 대동소이하다.
그렇다면 이 오름엔 노루가 많았었나?, 노루사냥으로 이름이 났었나? 이런 내용은 다음에 나오는 몇 '노리오름'에도 똑같이 적용되는가? 노루를 쏘아서 '노리손이'라 했다면 지명에 반영될 만큼 특별해야 할 것인데 그런 건 설명하지 않고 마치 당연히 그런 것처럼 일반화해 버리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논리 전개다.
'-순이', '-손이', '-생이'의 정체
제주 지명에 들어 있는 언어는 오늘날의 언어와는 상당히 다르다. 그것은 지금까지 본 기획에서 다루었다시피 많은 사례에서 알 수 있다.

노리손이, 사진에서 봉개동 제주4·3평화기념관 뒤 동서로 길게 두 개의 봉우리로 된 오름이다. 김찬수
제주 지명에서 보이는 언어들은 고대어가 상당히 많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보다 훨씬 이전의 언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래된 언어들도 밝혀지고 있다. 국어사에서 고대어란 광개토대왕비가 건립된 서기 414년부터 13세기 말까지의 국어를 지칭한다.
이 오름과 짐승 노루의 관계를 명확히 제시하지 못한다면 그 외에서 기원을 찾는 것이 마땅하다. 퉁구스어로 '느르'는 '긴' 혹은 '산맥'이란 뜻이다. 우리말 '늘다', '늘이다'의 어간 '늘'과 어원을 공유한다. 몽골어에서도 산맥을 '누루(몽골어 нуруу; 영어 알파베트 표기 nuruu)'라고 한다. 등뼈를 지시하기도 한다. '길게 산맥을 이루는'의 뜻이다. 시대 혹은 지역이나 개인에 따라 '노로', '노리', '노루'로 발음할 수 있다.
'-순이', '-손이', '-생이'란 무슨 뜻인가. 이 말은 고대어 그중에서도 고구려어에서 기원한 '술이'의 변음들이다. 봉우리를 지시한다. 여기서 '솥', '삿', '생', '싕' 등으로 다양하게 분화했다는 점은 이미 본 기획 59회에 자세히 다뤘다. 이런 지명어가 붙는 오름은 '높고 긴 산'을 의미하기도 하며, 어승생, 사스미(녹산), 거린사슴 등을 예로 들었다. '노리손이'란 산맥처럼 길게 늘어진 산을 지시한다. 이 오름의 지명 노로순이, 노리손이, 노루생이, 노리오름을 보면 유별나게 '노리오름'에만 '-손이'라는 지명어를 생략하고 그 대신 '-오름'을 붙였다. 즉, '노리손이오름'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순이', '-손이', '-생이' 자체만으로 오름을 지시하는 지명어 구실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주시 봉개동 명도암에도 같은 이름의 오름이 있다. 이 오름은 동·서 두 개의 오름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 큰노리손이는 표고 426m, 자체높이 52m, 서쪽 족은노리손이는 표고 413.8m, 자체높이 28m다. 이 두 개의 봉우리로 된 노리손이는 연동의 노리손이와 지명이 같을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설명도 옛날 노루를 쏘았던 어쩌고~처럼 거의 같다. 엉뚱한 이야기다. 역시 산맥처럼 길게 늘어진 산을 지시한다.
산맥처럼 길게 늘어진 산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리에도 노로오름이 있다. 여러 개의 봉우리로 되어 있다. 이름이 거의 같으나 이 오름에는 '-손이'가 붙어 있지 않다.

노로오름, 애월읍 유수암리에 있다. 큰노꼬메에서 촬영했다. 김찬수
노루가 많이 서식해서 붙은 이름이라는 설명이 널리 유포되어 있다. 노루는 많았지만 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엉뚱한 얘기다.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에도 노로오름이 있다. 표고 419m와 418.2m의 봉우리들이다. 서귀포시 하원동에도 노리오름이 있다. 이 오름들도 모두 산맥처럼 길게 늘어진 오름들이다.
연동 노리오름의 한자표기는 노로객(勞老客), 노로객악(勞老客岳), 장손(獐遜), 장손악(獐孫岳), 장악(獐岳) 등이다. 노로객(勞老客)은 '노로+객(客)'이다. '객(客)'은 '손 객'이니 '노로손'을 표기한 것이다. '장손(獐遜)'의 '장(獐)'은 '노루 장(獐)'이다. 훈의 발음만 빌려 쓴 것이다. '손(遜)'은 '겸손할 손'이다. 음만 빌렸다. '노루손'이라고 표기한 것이다. '장악(獐岳)'도 마찬가지다. 노루를 중세국어에서는 '노로' 혹은 '노라'라 했다. 그러므로 '노로오름'을 표기한 것이다. 이들 한자 표기에서 노로객악(勞老客岳), 장손악(獐孫岳)의 '악(岳)'은 덧붙은 것이다. 제주도에서는 '-순이', '-손이', '-생이' 자체만으로 오름을 지시했다. 이것을 모르는 기록자들이 굳이 '악(岳)'을 붙인 것이다.
노리손이, 노로순이, 노루생이, 노리오름, 노로오름 등은 짐승 노루와 관계가 없다. 산맥처럼 길게 늘어진 오름을 나타내는 지명들이다. 고대 몽골어계 기원이다.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
■기사제보▷카카오톡 : '한라일보' 또는 '한라일보 뉴스'를 검색해 채널 추가
▷전화 : 064-750-2200 ▷문자 : 010-3337-2531 ▷이메일 : hl@ihalla.com
▶한라일보 유튜브 구독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