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천 미밋동산에서 만세를 부르는 모습을 그렸다. /그림=강부언
제주에 조국 독립과 항일정신을 함성으로 일깨웠던 곳한말~일제강점기 등 제주 근·현대사의 주요 인물 배출'방성칠난' 등 不義에 저항했던 정신 후손들에게 이어져
8월 20일 다시 조천리를 찾았다. '연북정'에 이어 조천만세운동을 다루기 위해서다. 마침 조천항일기념관에는 방학을 맞아 견학하러 온 어린 학생들의 재잘거림으로 활기를 띠고 있었다. 동행한 강부언 화가와 함께 전시장을 천천히 둘러 본 뒤 밖으로 나와 '미밋동산'(만세동산)에 올랐다. 노송 그늘에 앉으니 한 여름인데도 시원한 바람이 분다. 이마와 등을 타고 흐르던 땀도 금세 멎어 온다.
지금부터 90년 전인 1919년 3월21일 이곳 미밋동산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는 함성이 울려 퍼진다. '제주도지' 등에 소개된 기미년 독립만세운동의 줄거리는 이렇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의 탑골공원에서 점화된 독립만세운동은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한 독립선언서를 읽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전국으로 확산됐다. 당시 서울에서 이 운동에 참가했던 학생 중에는 휘문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김장환(18)이 있었다. 그는 달포 뒤인 3월 16일 숙부인 김시우의 소상에 참배하기 위해 고향인 조천리로 내려 온다. 그는 당숙인 김시범과 김시은에게 서울 소식을 알렸고, 숙부들은 동지를 규합하여 소상날(3월 2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일을 추진했다. 마침내 이들은 소상날 마을의 서당에 다니던 학동들을 미밋동산에 모이게 했다. 이어 서울에서 몰래 가지고 온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22일에는 조천리에서, 23일에는 장터에서, 24일에는 함덕리에서 연일 독립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이 일로 주동자 14명이 보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 되었다. 이들은 광주지방법원에 이어 그 해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최종 형이 확정된다. 김시범(30) 김시은(30)은 징역 1년, 이천문(28세) 김년배(23) 박두규(23) 김희주(26) 황진식(20) 김필원(20) 김장환(18)은 징역 8월, 김경희 김용찬 백은선(24) 고재륜(21) 김형배(19)는 징역 6월에 처해진 것이다.

▲1919년 3월21일 시작된 조천만세운동은 조천이 항일운동의 본거지 역할을 수행하는 시발점이 됐다. 사진은 3·1만세운동 당시를 재현한 모습. /사진=한라일보 DB
그런데 그 중 백응선은 출옥 후에 옥고로 인해 죽음을 맞게 된다. 그러자 함께 투옥생활을 했던 나머지 13명의 동지들은 돈을 모아 조천읍 교래리 지경의 무덤가에 비석을 세웠다. 묘비에는 "…기미년 봄 군(君)과 더불어 뜻을 같이한 14인은 독립을 선전하다가 체포되어 복역을 마치고 출옥하였는데 반년이 못되어 문득 불귀의 객이 되었도다. 오호라, 슬프도다. 가슴속에 새겨 말하노라. 오호, 백군이여 천명이런가 동지 14인은 바야흐로 투옥되었지만 조국독립을 위해 내 몸 버리기를 홍모(鴻毛)와 같이 가볍게 여겼는데 급기야 출옥하였지만 일편단심 맹세한 것은 지난 날과 같았도다(후략)"며 넋을 위로했다.
조국독립을 위한 그들의 정신과 희생은 헛되지 않았다. "이 일이 일어난 이후 조천은 항일운동의 본거지가 되고, 조천 출신들은 항일전선에 몸을 던져 일제당국으로부터 온갖 수모와 곤욕을 치르면서도 제주의 항일운동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향토사가인 김찬흡이 '제주도지/제주항일운동'에서 기록한 내용이다. 그렇다면 숙부의 소상에 참배하기 위해 내려 온 유학생 김장환에 의해 촉발된 조천만세운동은 우연의 산물이었을까. 아니면 작은 불씨가 금세 타오르게 한 기름과 같은 어떤 인화물질이 조천리에 깔려 있었던 것일까.
문득 몇몇 사건과 인물들이 떠오른다. 한말 외무대신을 지내다 1897년 제주에 유배된 운양 김윤식이 남긴 '속음청사'도 그 중의 하나다. 1898년 제주에 '방성칠난'이 발생하자 온 섬이 그 기세에 눌리던 무렵이었다. 그 때 "유독 김판관 응빈(膺斌) 만이 분개하고는 죽더라도 적을 치겠다는 뜻이 있었다." 응빈은 조천리 출신 인물이다. 그는 몇몇 뜻을 같이한 이들과 함께 해미현감을 지낸 형 응전(膺銓)이 사는 조천포로 옮겨 적을 토벌할 일을 의논한다. 그러나 총칼을 갖고 있는 난당(亂黨)들과 빈 손인 민정(民丁)이 대적할 수는 없다고 모두가 피하려 했다. 그럼에도 응빈과 그의 종제인 응해는 가까운 부락에 통문을 내고, 조천을 창의소(倡義所: 의병본부))로, 응빈을 창의장(倡義長)으로 삼고 민정 및 포수선발에 들어 갔다. 1000여명이 창의군에 몰려 들었다. 그러나 채찍이나 몽둥이 정도만 갖춘 이들이 총칼로 무장한 무리들을 대적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결국 창의군은 난당(亂黨)의 무리가 다가오자 흩어져 버렸고, 그들은 김 판관 집등을 불태워 버렸다. 비록 변변한 항전도 벌이기 전 실패로 귀결됐지만 조천출신 판관 형제들이 목숨을 걸고 불의에 대적했던 기개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게 조천만세운동이 벌어지기 불과 21년 전 일이다.
세월은 흘러도 선인들의 정신은 남는다고 했던가. 방성칠에 대항했던 조천 출신 판관 김응전은 정의현감을 지낸 김문주(1859~1935)를 낳고, 그는 또 독립운동가이며 문장가인 아들을 배출하니, 형식(瀅植)과 송산 명식(明植)이 바로 그들이다. 독립운동가로서 뚜렷한 자취를 남긴 목우 김문준(金文準·1893~1936), 죽암 고순흠(1893~1977) 등도 조천리가 고향이다. 민군정 때 제주도사(制州島司) 서리로서 제주를 '도(道)'로 승격 시키는데 앞장섰던 김문희(金汶熙)도 판관 김응빈의 아들이다. 그는 제주역사연구에 매우 소중한 자료인 '증보탐라지'를 '담수계'가 펴내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들의 자취는 몇 권의 책으로 펴내도 모자랄 만큼 제주 역사를 관통하는 크고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 있다. 이처럼 조천리는 한말에서부터 일제강점기를 지나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애국·독립지사를 배출하고 있다. '제주의 인물 절반은 조천에서 나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것은 비단 조천리 만의 긍지가 아니라 제주의 자랑이기도 하다. 그래서 조천에 가면 자기 고향의 인물자랑을 삼가(?)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