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100년' 제주 원풍경을 되살린다](5)남문성과 옛 기록들

['경술국치 100년' 제주 원풍경을 되살린다](5)남문성과 옛 기록들
옛 이야기들이 전해오는 濟州城 남문
  • 입력 : 2009. 03.02(월) 00:00
  • 강문규 기자 mgkang@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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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강부언 화가(한국화)

佛·日 여행기마다 주요 기록들 남겨
성밖에는 약초와 숯 등 토산물 시장
1925년 제주항 축항공사 때 사라져


제주시 오현단 남쪽에는 동서로 100여m 남짓 성채가 남아 있다. 이 곳을 보며 탐라국시대 이래 2000년간 제주섬의 핵심 치소였던 역사적 사실을 떠올리기란 버거운 일이다. 제주에 성이 세워진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수서(隨書)에는 백제 위덕왕 35년(588)에 수나라 전함 한 척이 제주에 표착한 뒤 백제를 거쳐 본국으로 송환되었던 기록이 남아있다. 그 기사에 "탐라국 읍(邑)에 성이 있었다"라고 했다. 대략 1400여년 전 이미 읍성이 존재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내용이다. 고려 원종 11년(1270)에는 삼별초군의 별장 이문경이 성문을 열어 통과하고자 하였으나 성주(星主) 고인단이 불응, 성을 고수함으로써 성안의 피해를 모면했다는 기록도 전해온다.

조선조에 들어오면서 태종 11년(1411) 읍성을 수축하라는 지시가 내려온다. 당시 성의 규모는 병문천과 가락천 사이에 쌓아졌다. 명종 10년(1555) 왜선 40여척이 침입한 뒤 곽흘 목사가 동성을 산지천 밖으로 넓혔고, 이 때 동·서쪽에 각 1문을, 남쪽에 2문을 두었다. 선조 32년(1599) 목사 성윤문이 대대적인 제주성 개·보수에 나서는데 성굽을 5척이나 확장하고 성 높이도 11척에서 13척으로 높여 쌓았다. 이 때 두 개였던 남문을 하나 없애는 동시에 문마다 초루를 만들었다. 즉, 제주성의 동문인 제중루(濟衆樓; 뒤에 延祥樓로 개칭), 서문인 백호루(白虎樓; 뒤에 鎭西樓로 개칭), 남문인 정원루(定遠樓)가 그것이다. 성윤문 목사는 이와 함께 산지천·가락천으로 나뉘어진 동·서를 잇기 위해 남쪽에 남수각을, 북쪽에 홍예교를 축조하기도 했다.

▲제주성 남문인 정원루는 1599년 성윤문 목사가 세웠다. 성문 밖에는 장작이나 숯 등의 땔감과 약초, 열매 등을 파는 이들로 붐볐다고 한다. 현재 남문로터리에서 중앙천주교회로 이어지는 길(원표시 지역)에 남문이 있었다. /사진=김명선기자 mskim@hallailbo.co.kr

이처럼 제주성의 축성시기는 1천년을 훨씬 뛰어넘고, 성문 역시 수백년간 지탱해 왔다. 역사가 오래된 곳에는 이야기들이 깃들어 있기 마련이다. 프랑스인 '세레·롱베'의 제주탐험기도 그 중의 하나다. 그는 당시 이집트연구회 회원으로, 또 노르망디 지리학회 회원으로 많은 연구업적을 쌓던 중 미국 정부의 요청으로 1887년 10월부터 2년간 주한미국공사관 대리공사로 근무하게 된다. 이 때 그는 제주를 방문한 체험과 서울과 부산, 원산 등지를 여행했던 기록을 묶어 '꼬레, 또는 조선-아침이 맑은 나라'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펴내게 된다.

세레·롱베의 제주여행기를 보면 흥미로운 기록이 보인다. 그는 1888년 8월 조선인 통역사, 요리사 등과 함께 백인으로는 유일하게 제주의 화북포구로 들어온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지방관(제주목사)의 허락을 받고 호위병들과 함께 말을 타고 두 시간 정도 행진한 뒤 남문에 도착한다. 문은 굳게 닫혀 있고 성벽의 탑과 감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에 가득찬 눈으로 이 이방인을 내려보고 있었다. 드디어 문이 열리자 일행은 말을 탄채 제주성 거리로 들어섰는데 엄청난 군중이 이들을 구경하려고 몰려들어 호위병들이 곤봉을 휘둘러 내쫓을 지경이었다. 한 동안 행진이 계속된 뒤 200여명이 넘는 병사들이 도열해 있는 곳을 지나 목사가 있는 곳으로 안내된다. 곧이어 이들을 환영하는 축포가 울려퍼지기도 했다. 지금부터 120년 전의 기록이다.

세레·롱베는 1653년 제주에 표착, 제주를 서양에 최초로 소개한 헨드릭 하멜 이후 255년 만에 방문한 서양인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또한 1901년 서양인으로서 한라산을 처음 등정한 뒤 높이를 첫 측정(1950m)한 독일인 지그프리드 젠테보다도 13년 전에 학술적인 목적을 위해 찾은 인물이어서 당시 이방인들의 눈에 비친 제주의 모습이 어떠했는 지를 유추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위의 사진은 제주특별자치도가 펴낸 사진집 '제주백년'에 실린 제주성 남문의 모습으로 한말의 풍경이다.

일본 동경대 공학박사로 일본문화재건조물보존기술협회 이사를 지낸 후지시마 가이지로(藤島亥治郞. 1899~?))의 제주여행기는 더욱 관심을 끈다. 이 자료는 1923년 4월 제주에 내려 온 뒤 도일주하며 문화재 답사에 나섰던 기록을 바탕으로 그의 나이 91세였던 1980년대 후반 오사카에 있는 탐라학회지인 '탐라(耽羅)'에 발표한 자료다. 그는 산지천의 홍예교와 남수각 무지개다리의 경관을 보고 중국은 물론 조선내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건축양식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는 전공자답게 곧 줄자로 측량에 나선다. 그 결과 단형아치교(북수구)는 길이 25척, 너비 12.5척이며, 안경교(남수각)는 길이 30척, 너비 11.5척, 높이 17척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북수구(홍예교)와 남구각(안경교)에 관한 실측자료는 거의 유일하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라고 할 것이다.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재위원회 김익수 위원에 따르면 남문성 밖에는 지역의 토산물을 파는 상인들이 작은 시장을 형성했다고 한다. 이들은 주로 약초와 열매, 장작이나 숯 등을 팔았다. 이는 한라산과 가까운 지리적 특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동문가에는 철물이나 육지부 등에서 들여오는 물품들이, 그리고 서문 밖에는 육고기를 파는 푸줏간과 함께 숯과 장작 등의 땔감, 어물류 등을 사고 파는 사람들로 붐볐다고 한다. 사람들이 오가는 길목에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룸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글=강문규 논설실장

후지시마 박사의 소중한 기록

후지시마 박사는 제주성 원형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관찰, 기록으로 남긴 인물이다. 그는 여행기에서 "그 즈음(1925년)의 제주는 읍성시대의 잔영이 상당히 남아 있었다"고 했다. 즉, '동국여지승람'에 "석축 4394척, 높이 11척"이라고 되어 있는 제주성은 바다 가까이에 동·서 800m, 남·북 600m 가량이 남아 있는데 위쪽은 허물어져 높이가 3m정도 되었다"고 했다. 그는 또 "그 성(제주성)의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면 버섯과 같은 작은 초가지붕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고, 그 사이사이로 관덕정 기와지붕만이 버선코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남과 동의 성벽 밖에는 홍교(虹橋)가 걸린 산지천이 흐르고 있었다"고 했다.

후지시마의 기록은 제주성이 제주항 축항공사(1925~1928)로 사라지기 바로 직전의 모습이다. 그런데 일제는 1000년을 훨씬 넘는 오랜 세월 제주인들이 대를 이어가며 수축해 온 읍성을 헐어 골재로 사용하고, 그 유지(遺址)에는 도로를 개설해 버렸다. 제주성은 지금 오현단 남쪽 일부 구간에만 잔해가 남아 있을뿐 옛 성을 복원하려는 움직임은 구체화되지 않고 있다. 후지시마가 제주를 찾았을 때 제주목관아는 이미 관덕정 만을 남기고 대부분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1910년의 경술국치와 함께 일본인 도사(島司)가 근무하는 제주도청(島廳)이 제주목관아에 들어서며 옛 관아건물들을 헐어버리고 일본식 관청으로 바꾸어 버린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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