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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 장편 연재/갈바람 광시곡
[강준 장편 연재] 갈바람 광시곡(44)
편집부 기자 hl@ihalla.com
입력 : 2019. 12.26. 2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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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 작/고재만 그림

15-2. 화려한 불꽃 뒤, 어둠



"중국 자본 못 막아. 하나도는 잔챙이야. 한국 곳곳에 그보다 더 넓고 좋은 땅 많거든. 중앙에 우리 인적 네트워크가 얼마나 단단한지 넌 모를걸. 편 나누고 모함하고 고자질하다가 망한 게 너희 조선 나라야."




잠시 움찔 하던 병찬이 시선을 내리 깔며 담담하게 말했다.

"형이 쓴 기사 읽었어. 한편으론 시원하기도 하고 누군가 해야 하는 걸 형이 해냈다는 것이 자랑스럽기도 해. 하지만 공무원 사회는 너무 좁아."

용찬은 병찬이 말하려는 의도를 알았다. 지난 번 친척이라며 사무실로 찾아왔던 작자가 병찬을 찾아간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아도 평생직장이라고 생각한 신문사를 쫓겨날지도 모른 상황인데 자신을 탓하러 온 동생이 미련스러웠다. 용찬은 다시 버럭 소리쳤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서슬에 놀란 병찬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멀뚱하게 용찬을 바라보기만 했다.

"누가 시켰어? 내 입 막으라고 누가 시켰냐고?"

"형. 시키긴 누가 시켜. 내 밥줄이 달린 문제야."

병찬은 억울함에 반항이라도 하듯 대들었다.

"이런 못난 새끼. 그래서 어쩌라고?"

용찬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일어서며 탁자를 엎어버렸다.

삽화=고재만 화백



핸드폰이 울리는 소리에 잠이 깨었다. 눈을 떠보니 주변은 어두웠지만 창을 통해 들어온 불빛에 낯익은 천정의 형광등이 보였다. 자신의 침실이었다. 어떻게 해서 병찬과 헤어졌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 이놈의 술'하며 일어나서 벽의 스위치를 켜고, 계속해서 징징대는 핸드폰을 집어 드니 앞 번호가 국제 전화였다. 직감적으로 왕금산일 거라는 생각은 맞았다. 그런데 분노해야 할 금산은 핸드폰 너머에서 웃고 있었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여. 권용찬, 오랜만이군. 소문 들으니 크게 한 건 하셨더구만, 어떻게 몸은 다 나았나? 그땐 미안했어. 자네 불같은 내 성질 잘 알잖은가?"

용찬은 대답할 말을 잃고 듣고만 있었다.

"내 예고 기억하고 있지? 각오는 하고 있을 테지만 우선 서류 도둑질 한 놈들부터 모조리 찾아내서 응징할 거야."

용찬은 자신을 사정없이 폭행하던 금산의 모습이 떠오르자 몸이 떨렸다. 피 맛에 걸신들린 괴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말이야. 중국 자본 못 막아. 하나도는 잔챙이야. 한국 곳곳에 그보다 더 넓고 좋은 땅 많거든. 서울에 우리 인적 네트워크가 얼마나 단단한지 넌 모를걸. 편 나누고 모함하고 고자질하다가 망한 게 너희 조선 나라야. 절대 우리 중국 이길 수 없어. 난 언제든 돌아간다. 기다려라."

용찬은 치밀어 오르는 부아를 꾹 누르며 빈정댔다.

"금산아, 넌 옛날 삼총사의 왕금산이 아냐. 혼자 밥통이 커졌다고 착각하고 세상을 우습게 보는데, 네가 좋아하는 맹자님이 한 말 기억하나? 부끄러움을 모르면 인간이 아니라는 말 말이야."

"하하하. 인간이 아니면? 원숭이?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데? 난 한국사람 정말 좋아서 한국 여자와 결혼하려고 했어. 그런데 무슨 소리 들었는지 아냐? '이 냄새 나는 뙤국 놈이 어디서 한국 여잘 넘봐?' 흥, 이건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x도 잘 난 것도 없는 것들이 인간을 무시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꼭 복수하고 말 거야."

"그래서? 그렇게 살아서 너한테 남는 게 뭔데? 인생 그렇게 패악질만 하다가 종 칠 거야? 그게 네가 찾던 행복이야?"

"너 우리 대룡반점에 걸린 액자 봤지? 커쿠나이라오, 고통을 이기고 힘써 일하라. 조상님은 늘 옳은 말씀만 남기시지. 너한테 이렇게 전화하는 것도 고통이야. 그걸 이겨내려고 무진 애쓰는 중이고. 인생이 뭐냐고 묻는 건 나한텐 사치야. 개같이 벌어서 정승처럼 즐기는 거지. 그러니 제발 태클 좀 걸지 말라구."

"금산아, 이러지 말고 우리 얼굴 좀 보자."

"흐흐흐. 날 잡을 수 있을 거 같아? 헌데 자네 좀 섭섭하더라. 친구라면서 대룡반점에 불 싸지른 놈 알면서 숨기고 있었다니 말이 돼? 그게 우정이냐? 그것 때문에 우리 아버지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지 알아? 그래서 병환도 도진 거구. 나 장석규 그 새끼 가만 안 놔둘 거야. 부자가 똑같아. 남에게 눈물 흘리게 하는 놈은 제 눈에 피눈물 나는 법이라는 걸 보여줄 거야."

대룡반점 방화 이야긴 대호한테 밖에 한 적 없었다. 순간 대호가 위태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너, 문대호 어쨌어?"

"문대호? 어쩌긴 잘살고 있겠지?"

"정소영인 어디 있는 거야?"

"그런 쓰레기 같은 조선족 년. 네가 좋아했으니 어디 찾아봐. 하하하."

"왕금산. 야 이 괴물 같은 새끼야! 넌 나쁜 놈보다 더 악질, 암 덩어리야 임마."

금산은 기괴한 웃음을 날리며 전화를 끊었다.



'애비가 빨갱이라 남 모함하는 건 유전이군.'
'육지서 굴러먹던 놈이 어디 와서 지적질이야.'
'제주도 이만큼 잘살게 된 게 누구 덕인 줄도 모르면서. 쯧쯧.'





기사를 쓰는데 속이 뒤틀리더니 헛구역질이 나왔다. 약이 다 떨어졌지만 병원에 가지 않았다.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오랜 시간 로비에서 기다리는 것도 지루하고 수치가 오른 혈액 검사서를 보고 야단치는 의사의 잔소리가 귀찮아 차일피일 미루었다.

그러다 오늘은 병원엘 가려고 작정했는데 저녁에 송별회가 있다는 연락을 받고는 또 하루를 미뤘다. 제주 파견을 마치고 서울 본사로 승진하여 귀임하는 송 기자는 그래도 소통이 되었던 몇 안 되는 기자 중 한 사람이었다.



용찬은 과음해서는 안 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몇 차례의 건배와 옆자리 동료 기자들의 권주를 마지못해 몇 잔을 마시고는 안주로 배를 채웠다. 그런데도 거리로 나서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도시의 네온은 취객들의 감각을 테스트하듯 휙휙 바뀌며 명멸했다.

식당에서 집까지 택시를 타기에는 애매한 거리여서 소화도 시킬 겸 인도를 따라 걸었다. 그런데 누군가 뒤를 따라오는 낌새가 느껴졌다. 돌아보니 밤중인데도 선글라스를 낀 고수머리 사내였다. 용찬이 발걸음을 빨리하면 그도 걸음을 재촉했고, 멈추어 서면 그 사내는 딴 짓하며 능청을 부렸다.

집 근처에 다다르자 뛰다시피 골목길에 들어섰는데, 거기엔 용찬을 기다리는 또 다른 두 사람이 있었다. 가로등에 드러난 그들은 생김새로 보아 중국인임이 분명했다. 털복숭이와 대머리였다. 순간 왕금산이 생각났다. 용찬은 위험을 느끼고 걸음을 멈췄다.

그들은 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내 용찬을 마주보며 확인했다. 그리고 중국말로 이야기 하더니 고개를 끄덕인 털복숭이 사내가 허리춤에서 칼을 꺼냈다. 순간 용찬의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당신들 누구야?"

대답 대신 칼을 든 털복숭이 사내가 달려들었다. 용찬아 움찔하며 피하는 순간 뒤에서 한 사내가 날아오르더니 그를 쓰러뜨렸다. 뒤따라오던 검은 선글라스의 사내였다. 털복숭이가 나동그라지자 지켜보던 대머리 사내가 덤볐다. 그는 쿵푸를 하듯 여러 동작으로 위협하며 달려들었으나 선글라스는 요리저리 피하며 그를 제압했다. 털복숭이가 일어서고 두 명이 공격했지만, 선글라스는 그들을 간단하게 처리했다.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그들은 줄행랑을 쳤다. 사태를 진압한 선글라스는 용찬에게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고는 사라졌다.

'누구지?' 누군데 나를 지켜줬을까?'

중국인 조폭들과 맞장 뜰 준비가 되어 있다는 종필이 생각났다. 그의 배려일 거라 판단하고는 전화를 걸었다.

"내 그럴 줄 알고 보디가드 붙였지. 그러게 밤에는 걸어 다니지 말고 택시를 타. 뭔 일이 있으면 즉시 전화하고."



금산이 골프채로 대호를 무지막지하게 폭행하는 꿈을 꾸다가 벌떡 일어났다. 핸드폰이 울리고 있었다. 새벽 2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또 금산의 전화인가 생각하며 휴대폰을 열었는데 다른 번호였다.

"여보세요?"

용찬이 응대를 했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잘못 걸렸겠지 했는데 잠시 후 다시 벨이 울리고 받으면 끊었다. 처음엔 누가 장난을 치나보다 생각했는데 세 번째 전화벨이 울렸을 때 용찬은 의도적인 위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보세요. 전화를 걸었으면 용건을 말 하세요."

그러자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들렸다.

"흐흐흐. 이 개새끼야. 일 벌려 놓고 잠이 오냐? 목 따러 갈 테니 자지 마."

용찬이 응답을 하려는데 끊겼다.

발신지로 전화를 걸었으나 없는 전화라는 메시지가 돌아왔다.

"이 자식들이 정말?"

혹시나 해서 컴퓨터의 전원을 켜고 자신이 인터뷰한 신문 기사를 찾았다. 역시 예상한 대로 많은 댓글이 달렸는데 두목회를 욕하는 내용, 용기를 격려하는 글보다는 용찬을 비방하고 헐뜯는 악풀이 더 많았다.

'애비가 빨갱이라 남 모함하는 건 유전이군.'

'육지서 굴러먹던 놈이 어디 와서 지적질이야.'

'제주도 이만큼 잘살게 된 게 누구 덕인 줄도 모르면서. 쯧쯧.'

'개쉐끼 기레기 배때기는 칼 안 들어가나.' 등등 원색적 비방 글이었다.

이메일을 열었더니 거기에도 발신자가 분명치 않은 메일이 여럿 있었다.

'똑바로 해. 한 방에 보내 버린다.'

'너 이렇게 분탕질 해놓고 이 바닥에서 만수무강할 수 있겠냐?'는 등 직설적인 단문성 협박 글도 있었다.

용찬은 이들이 자신의 뒷조사를 하면서 조직적으로 집요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다음 날 출근하면서 확인했다.



사무실 문을 열고 책상 위를 보니 소포가 놓여 있었다. 발신자를 보니 시골에 있는 어머니 이름이었는데 택배 딱지도 없었다.

'어머니가 무슨 소포를?' 고개를 갸웃거리며 포장을 뜯어보니 엷은 종이에 싼 해골바가지와 함께 회칼이 나왔다. 어머니를 음해하겠다는 암시였다. 용찬은 화가 났다.

"오 양, 이 소포 어떻게 된 거야?"

"아침에 출근하고 보니 문 앞에 놓여 있었어요. 왜요?"

오 양이 들어오다 용찬이 들고 있는 해골바가지를 보고 깜짝 놀라 차반이 기우는 바람에 커피 잔이 땅바닥에 떨어져 깨졌다.

"놀라지 마. 이거 모조품이야."

<강준 작가 joon4455@naver. 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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