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수장 희생자 기린 쓰시마 공양탑 한·일 민심 달래주길"

"4·3 수장 희생자 기린 쓰시마 공양탑 한·일 민심 달래주길"
위령제 찾은 김시종 시인
  • 입력 : 2019. 09.30(월) 2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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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때 수장 희생자 목격
"日 식민통치 4·3 등 초래
쓰시마 근현대사 비극 증거"


한눈에 봐도 지팡이를 짚은 시인의 모습은 불편해보였다. 근래 부쩍 몸이 쇠약해진 탓에 병원 신세를 져야 하는 그이지만 올해는 꼭 가야 한다며 나선 길이었다. 지난 29일 일본 쓰시마섬(대마도)에서 열린 제3회 제주4·3사건 쓰시마·제주 위령제를 찾은 김시종(90·사진) 시인이다.

일본 문단의 영향력있는 시인으로 지난 28일 쓰시마에 도착한 그는 히타카쓰항 인근 숙소에 짐을 푼 제주 사람들을 기다렸다 일일이 반갑게 맞았다. 4·3 시기인 1949년 제주를 떠나 일본으로 건너간 그에게 '우리 고장 제주'는 여전히 눈물나는 이름인 듯 했다.

"4·3사건 당시 수장이 시작된 게 1948년 10월말쯤 부터다. 손목에 쇠사슬을 묶어 수장시켰던 시신을 탑동 자갈밭에서 봤는데 물에 던져 오래된 탓인지 비지처럼 되었더라. 500여명이 수장 학살 당했다는데 실제로 떠오른 사람은 얼마 없었다. 그 시신들이 흘러갔다면 대마도로 표류해 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제 수 백구 표착 시신이 이곳에서 나왔다. 그 수가 얼마나 많았던지 대마도 사람들이 수습을 못해서 떼로 묶어서 다른 곳으로 띄워보냈을 정도였다."

지난 4월 제주시 건입동 주정공장 터에서 진행된 4·3위령제 등에서 증언했던 내용이지만 시인은 기자들에게 이 말을 다시 꺼내면서 울먹였다. '남로당 말단 당원'으로 직접 수장 희생자를 목격했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제주를 떠난 일이 여태껏 그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기 때문일 게다.

한·일 민간 차원에서 추진해온 쓰시마·제주 위령제의 탄생 배경엔 그같은 사연이 있다. 시인은 쓰시마로 떠밀려온 4·3의 혼들이 있다며 일본의 제주4·3한라산회 나가타 이사무 고문에게 알렸고 2014년 처음 위령제를 지냈다. 지난해 2회 행사는 건강 문제로 불참했던 그는 이번에 쓰시마의 에토 유키하루씨가 아버지의 뜻을 이어 세운 공양탑으로 향했고 5시간 가량 이어진 위령제도 끝까지 지켰다.

공양탑 참배 뒤 시인은 "쓰시마의 바다에서 영령들이 철썩철썩 파도소리를 내고 있다"며 위령제 주최자로서 의미있는 말을 전했다. 시인은 일본어로 읽은 인사말에서 "오늘 위령제에 참석해준 일본의 뜻있는 분들에게 대단히 죄송한 말씀이지만"이라고 운을 뗀 뒤 제주4·3과 6·25 전후 발생한 40만 여명의 예비검속자 학살, 나아가 분단된 한반도의 비극마저 제국 일본의 식민통치에서 유래했다고 밝혔다. 포츠담선언에 대한 일본의 패전 처리가 가장 큰 원인이라는 그는 "쓰시마는 일본 근현대사의 지울 수 없는 잘못을 증명해주고 있다"며 "이곳 공양탑이 죽은 자의 위령에 그치지 않고 일본과 한국의 민심을 어루만지는 자애로운 탑 앞으로 명소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진선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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