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향교 / 공자묘'(다케노 세이기치 그림 / 8.7x13.7㎝)
명륜당, 해방 후 제주대학원 강의실로 이용돼시대 따라 철거·재배치되면서 문화경관 구축
다케노의 그림①과 함께 '제주향교'로 가자니 여러 생각이 겹쳐 떠오른다. 일전에 필자는 미국의 인문 지리학자 데이비드 네메스의 '제주 땅에 새겨진 신유가사상의 자취'라는 책을 번역하여 펴낸 바 있다(2012년 제주시 우당도서관). 사실 그 책의 원제는 'Architecture of Ideology'라 하여, 문자 그대로 옮기면 '이념의 구축물' 또는 '구축물의 이념'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자체를 책 제목으로 삼기에는 너무 난해해 보여 결국 그 책의 부제를 번역서의 표제로 삼았던 것을 떠올린다. 그런데 '이념의 구축물'이란 난해한 표현에 반해 우리는 '문화경관(cultural landscape)'이라는 표현엔 익숙하다. 그렇다면 '문화경관'을 어렵게 표현한 것이 '이념의 구축물'이란 말이고, '이념의 구축물'이란 말을 쉽게 표현하면 '문화경관'이라 정리하면 어떨까. 적어도 제주문화경관에서 조선시대 성리학적 이념을 읽어내는 데이비드 네메스 맥락에서 말이다.
특히, 조선시대 모든 관아 건물이 그렇듯이 향교는 지방의 대표적인 문화경관이었다. 제주향교의 경우, 그것은 조선시대 관학으로 유학을 강학하고 인재를 양성하며 제주 유맥 600년을 이어왔다. 조선 태조 원년(1392년)에 제주성내에 창건된 후 여러 차례 이건과 중수를 거듭하다 순조 27년(1827년)에 현 위치(용담 1동)에 자리 잡았다. 전국 지방향교에서와 마찬가지로 과거 제주향교 내에는 공자를 비롯한 유가 성현들의 위패를 모신 제향공간, 즉 대성전과 동무, 서무가 있었다. 그렇다면 그림①과 사진②의 시점으로 돌아가서 당시의 제향공간인 대성전 주변을 떠올려 보자. 대성전은 관덕정이 바라다 보이는 동향으로, 좌우로 동무와 서무 건물을 두고 있다. 다케노는 그림①에 '공자묘 한국(제주도)'이라는 타이틀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1920년대 제주향교 '생활상태조사(2)'(조선총독부, 1929년 발행)
"서문(현재는 없음)의 서문교로부터 약 1킬로미터 서쪽방면. 현재 도내 일주도로 우측에 위치해있다. 옛날 당의 공자와 그 훌륭한 제자들을 배향하는 사당(하나하나 나무로 된 위폐로 길이는 약 80㎝~30㎝)으로 비명이 새겨져 있다. 양측 건물에도 수많은 위폐가 진열되어 있다. 이것은 당시 탐라국에서 공자학파를 계승한 학자들의 위폐로 여겨지며, 그 크기는 위의 것과 대동소이하다.(중략) 소학교 아동 시절에는 학교의 선생님들이 우리를 인솔하여 그곳에 갔었다. 좌측 광장에서 운동회를 한 적이 있다. 그 당시 학생들은 전교 통틀어 30~40명 정도였다. 정면의 큰 나무는 은행나무로 땅에 떨어진 은행을 주었던 추억이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당시만 해도 대성전 좌우로는 동무와 서무가 있었고, 그 사각의 공간 좌측에는 광장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학생들이 운동회를 했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리고 당시 일본인들은 제주향교를 '공자묘' 또는 '제주문묘'로 표기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대성전 뒤쪽(좌측 상단)을 보면 작은 건물이 보이는데 그것은 1854년에 지어진 계성사 건물이다. 이는 공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 등 다섯 성인의 아버지의 위패를 봉안해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덧붙여 사진③은 대성전 뒤 쪽으로 난 무성한 소나무 숲인데 이 숲 사진을 보면, 김윤식이 '속음청사'에서 1901년 제주민란 당시 교인들과 맞선 민당들이 '위축되어 감히 전진하지 못하고 물러나 향교에 들어가서 소나무를 의지하여 자신들을 가렸다'는 구절이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현재 향교 내 대성전의 외양은 1920년대 전후의 다케노의 그림①과 사진②와는 사뭇 다르다.

▲1920년대 제주향교의 소나무 숲 '생활상태조사(2)'

▲현 제주중학교 자리에 있었던 명륜당 '사진으로 보는 20세기 제주시'
한편, 제주향교에는 교육공간으로서 명륜당(사진④)과 동재(東齋), 서재(西齋)를 두어 유학을 강학하여 인재를 양성하였다. 명륜당은 그림①, 사진②의 우측 즉, 지금의 제주중학교 운동장에 동향(東向)하여 있었다. 사진④는 '20세기 제주시' 사진집에 소개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명륜당은 1900년 초에 철거되었다 한다. 일본인 고건축학자 후지시마 가이지로에 따르면, '명륜당의 일곽은 주옥(主屋)이 3칸씩의 익사(翼舍)를 갖추었다. 명륜당은 백목조(白木造)로 주옥(主屋)은 난석 쌓기 한 기단 위에 서있고 난석사이에 전(塼)으로 뇌문(雷紋)을 넣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이후 어떤 외형의 건물로 교체되었는지는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해방 후 명륜당이 제주대학교의 모체인 제주대학원(濟州大學園)(1951년)의 강의실로 쓰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이후, 1965년 명륜당이 화재(火災)로 소실(燒失)되었고, 1969년 향교 재단에서 재원을 마련하여 1970년에 철근콘크리트조로 신축되었다. 현재 명륜당은 대성전 남측, 즉 그림①의 우측에 있다. 말하자면 조선시대 향교 이념에 따른 전묘후학(前廟後學) 또는 전학후묘(前學後廟)라는 유교 원리와는 거리가 멀다.
향교 그리고 그림과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외삼문 즉, 입학문 역시 명륜당 앞으로 동향하여 있었고, 외삼문 밖으로는 지난번 글(8)에서 설명한 홍살문이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경관은 제주중학교 확장시 이전하여, 지금의 향교 남측에 입구 역할을 하는 대성문(1974년 신축)으로 탄생하였다.
이처럼 조선시대 성리학의 이념에 따라 구축되고 또 배치되던 것이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는 또 다른 이념과 목적으로 철거되거나 또는 재배치되고, 해방 후에는 근대화다 새마을 운동이다 관광이다 하면서 또 다시 그 이념에 맞는 문화경관을 끊임없이 배출해 오고 있는 셈이다. 어찌 보면 과거에는 그만큼 낯설면서 금기이고 외경의 대상이던 장소와 공간이 소비와 정복의 대상으로 변질 또는 창출되고 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미학자·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