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7월 중순, 제주의 작가들이 베를린의 오모 아트스페이스에서 단체전을 연다. '두 개의 하얀 방―걷는 눈, 읽는 손'이다. 제목의 두 방은 따로 떨어진 두 전시실이 아니라, 한 공간 안에 겹쳐 놓인 흰 벽과 흰 페이지다. 우리는 흰 벽 앞에서 걷고, 흰 종이 위에서 읽는다. 달라 보이는 두 동작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먼저 흰 표면이 있고, 그 위에 무언가 놓이고, 그제야 시선이 도착한다. 이 전시는 그 점을 미술관의 흰 벽과 책의 흰 페이지 양쪽에서 함께 다룬다. 비어 보이는 표면이 사실은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볼지를 정한다는 것, 그래서 벽과 페이지는 닮은 두 제도가 아니라 같은 질문을 나눠 가진 두 방식이라는 것이 이 전시의 출발점이다.
그 질문은 '공간을 넘는다'는 말과 맞닿는다. 하나는 거리의 문제다. 섬은 오래 고립과 같은 말이었지만, 책은 바다와 국경을 가장 가볍게 넘는 전시였다. 한 권의 책은 접히는 방이고, 곁에 두고 펴는 방이며, 주머니에 들어가는 전시장이다. 제주의 작업이 베를린으로 건너가는 일은 거리를 지우는 일이 아니라 거리를 하나의 재료로 바꾸는 일이다. 섬과 대륙 사이의 거리가 여기서는 작품이 통과하는 두께가 된다. 값싸게 찍어 손으로 묶는 지면은, 중심에서 비켜선 자리가 스스로 말을 시작하던 오래된 통로이기도 했다. 제주가 오래 '여백'으로 불려 왔다면, 이 전시는 그 여백이 빈자리가 아니라 읽을 수 있는 표면임을 보여 주려 한다.
다른 하나는 차원의 문제다. 이 전시는 2차원의 지면과 3차원의 공간을 같은 흐름으로 본다. 한 공간 안에서 흰 벽은 설명을 걷어 낸 채 천천히 바라보는 시간을 열고, 흰 페이지는 손이 넘기며 읽는 시간을 연다. 오봉준의 팝업북에서 평면의 종이는 손끝을 따라 작은 입체로 일어선다. 좌혜선의 목탄은 같은 흔적이 벽과 종이 위에서 어떻게 다른 무게를 갖는지 묻는다. 사라 오-목크의 종이 조각은 한 장의 평면을 둥근 부피로 부풀린다. 세 작업 모두 평면이 입체를 숨기고 있다가 손이 닿는 순간 일어선다. 페이지는 전시가 끝난 뒤에도 누군가의 가방 안에서 다시 펼쳐지는, 들고 다니는 전시장이 된다. 벽은 자리에 머물지만, 페이지는 손에서 손으로 옮겨 간다. 그렇게 페이지는 생각을 담아 두는 그릇이 아니라 생각이 펼쳐지는 공간이 된다.
걷는 눈과 읽는 손은 다른 감각이 아니라 다른 속도다. 한쪽은 공간을 걸어 시간을 만들고, 다른 쪽은 시간을 넘겨 공간을 만든다. 제주에서 베를린으로, 흰 벽에서 흰 페이지로, 다시 평면에서 입체로. 평면은 공간을 품고, 공간은 다시 한 장으로 접힌다. 경계를 넘는 일이 그대로 작품이 되는 자리에 이 전시가 선다. 지금 이 글이 놓인 신문의 지면도 하나의 흰 표면이고, 그것을 넘기는 당신의 손도 이미 그 전환의 일부다. 멀리 있는 섬의 작업이 한 장의 종이를 통해 가까이 도착하는 셈이다. <이나연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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