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아직 한낮의 볕은 요지부동이다. 그래도 배롱나무꽃은 문드러졌고 해지면 풀 속에선 귀뚜라미가 서늘한 소리를 시작했다. 어쨌거나 지구가 자전과 공전으로 돌고 도니 밤낮이 바뀌듯 기다리면 여름도 가는 것이다.
지갑에 딸려 나온 동전이 길바닥에 떨어졌다. 한 발치 굴러가던 동전은 방향을 틀어 이내 길가 배수구 속으로 모습을 감춘다. 둥근 것의 본성이 구르는 것이라지만 내게서는 기를 쓰고 달아나려만 하니 부아가 치민다. 집은 멀었는데 갑자기 뒤가 묵직했다.
열 살쯤, 길을 가다 담 밑에서 동전을 주웠다. 10원, 능히 십리(10里)길 가며 빨아먹는다는 돌사탕이 두 알이었다. 할 일 없이 마루에 누워 입안에 동전을 넣고 굴리다 잠깐 선잠이 들었다. 아뿔싸, 고인 침을 넘긴다는 게 동전까지 삼켜버렸다. 쇠못에 찔려 쇳독으로 죽었다던 영춘이 삼촌. 배 속이 울렁이고 매슥거렸다. 눈물이 지질한 채 어머니를 찾았다. 어머니는 딱 한마디 하셨다. "똥 싸면 나온다"
애를 썼지만, 똥은 나오지 않았다. 다음날, 달력 한 장을 뜯어 마당에 깔고 앉았다. 항문이 찌릿했다. 양이 많아 헤집어 찾으려면 막대기가 필요했다. 바지를 대충 추켜 나무막대를 찾아 돌아왔는데 이럴 수는 없었다. 뒷집 영란이네 도끄가 똥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휘두르는 막대기에 꽁지 빠지게 달아나는데 다리 둘이 다리 넷을 당할 수는 없는 법. 돌아온 마당 바닥엔 색동저고리로 멋을 낸 예쁜 누나가 똥분을 펴 바르고 웃고 있었다.
도끄는 고급종이라 똥을 먹지 않는다. 영란이는 단호했다. 해녀 망사리를 내려놓으며 똥을 쌌는지 어머니가 물었다. "쌌는데 도끄가. 분명 봤는데 영란이가" 억울한 나는 돈의 내력을 길게 설명했고 듣던 어머니는 짧게 정리하셨다. "그러면 영란이 것이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내가 주웠으니 내 돈이고, 내가 쌌으니 내 똥인데 도끄가 훔쳐먹어서 영란이 돈이 된다니. 어머니는 덧붙였다. "돌고 돌아서 돈이다"
밤하늘에는 둥그런 달이 걸렸고 동그란 동전과 돌사탕이 똥그랗게 돌았다. 동그란 것들이 문제였다. 둥근 건 죄다 이동형. 둥그런 달이 동그랗게 지구를 돌고 동그란 지구도 태양을 똥그랗게 돈다. 돌지 않는 것은 태양뿐. 다음날, 마당에 서서 바지를 내리고 빙글 돌았다. 참았던 오줌으로 반원도 못된 것이 비뚤 그려졌다. 강약조절을 잘해야 했다. 기를 써 힘 조절 끝에 나는 드디어 원의 중심, 돌지 않는 태양이 되었다.
"뭐하는 거냐?" 마당에 들어서던 월선이 고모가 태양인에게 물었다. 내렸던 바지는 추리지 못했고 얼굴은 태양초만큼 달아올랐다. 듣기로 월선이 고모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일렀다. "그 아이, 돈 거 닮아라"
태양도 전체 우주계를 돈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오늘도 변함없이 동그란 것들은 돌고 있다. 반백 머리 태양인도 어느새 인생의 한 갑자(甲子)를 돌고 있다. 돈도 여전히 돈다. 나만 쏙 빼고. <신순배 수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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