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의 하루를 시작하며] 어둠의 무늬를 따라, 그럼에도 빛은 흐르고

[김연의 하루를 시작하며] 어둠의 무늬를 따라, 그럼에도 빛은 흐르고
  • 입력 : 2025. 06.18(수) 01:30
  • 고성현 기자 kss0817@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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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무언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어떤 어둠에 기대어 가능한 일일까요

어떤 어둠의 빛에 눈멀어야 가능한 일일까요

세상에, 가능주의자라니, 대체 얼마나 가당찮은 꿈인가요'

<나희덕, '가능주의자' 부분>



절망이 말의 무게를 짓누르는 시대, 어쩌면 '가능'이라는 단어를 꺼내는 일은 가장 외롭고 무모한 선택일지 모른다. 희망을 되뇌는 사람은 어둠에 등을 기대고 있기에 말할 수 있으며, 그 가능성은 언제나 불가능의 짙은 그늘에서만 빛을 얻는다.

2025년, 광장은 다시 뜨겁게 일어섰고, 그 뒤를 이은 조기 대선은 거대한 혼란의 잔재 위에서 치러졌다. 그러나 선거보다 더 오래 우리를 갉아먹은 것은, '정치'가 아니라 '정치적 감정'이었다. 타인은 반대편이 아니라 타도의 대상이 되고, 대화는 공존을 위한 기제가 아닌 진영의 명분을 쌓기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 이 시대의 혐오에는 논리가 없다. 감정 이전의 감각, 관념 이전의 본능처럼 다가온다. 혐오란 타인이 나를 무너뜨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에서 출발하며, 그 불안은 나와 다른 모든 존재를 '오염'으로 여기는 감각으로 변질된다. 그래서 혐오는 늘 약자를 향하고, 이유 없이 반복된다.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그것이 젠더 정체성이든, 정치적 입장이든-. 이 짧은 선언조차 용기가 필요한 사회.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이 여전히 '선언'이 돼야 하는 이 세계는, 아직 진정으로 민주적이지 않을지 모른다. 혐오는 눈에 보이는 차이보다, 그 차이가 나를 흔들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서로를 멀리하고, 그 거리는 곧 혐오의 토양이 된다. 이러한 혐오의 토양 위에서, 정치적 발화는 오랜 시간 '양극화'라는 구조를 타고 증폭돼 왔다.

12·3 사태 이후의 정서는 그 균열을 극단으로 밀어붙였다. 그러나 이 심리적 내전을 멈추는 열쇠는, 거창한 시스템보다 언어에 있을 것이다. 정치적 감정을 조절하고, 공감의 언어를 회복하는 일. 혐오와 증오의 말을 줄이고, 중간 지대를 향해 '동감'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 이는 예의의 문제이기에 앞서 감정의 구조를 다시 짜는 일일 것이다.

새 정부의 출범에 우려와 걱정이 앞서는 것은, 이 시대에 깊이 뿌리내린 혐오와 분열의 감정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감정의 방향을 되돌리는 일이다. 다른 삶을 상상하고, 타인의 서사를 읽어내는 일, 예술과 문학의 시작 또한 바로 그런 '응답의 윤리'에 기초할 것이다.

세계를 쉽게 낙관하자는 말이 아니다. 삶은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질곡 위에 놓여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어두운 현실 앞에서도 여전히 손을 내밀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희망한다. '가능주의자' - 그 무모한 이름이야말로 지금, 이 시대에 가장 절실한 윤리인지도 모른다. <김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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