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훈의 제주마을 탐방](102) 서귀포시 대정읍 보성리

[양기훈의 제주마을 탐방](102) 서귀포시 대정읍 보성리
대정고을 성담에 대정현 사람들 역사적 자부심 고스란히
  • 입력 : 2016. 09.20(화) 00:00
  • 편집부 기자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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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방산에서 모슬봉까지 시야에 들어오는 마을회관 옥상 너머의 전경(위)과 대정성 서문이 있던 자리(아래).

관아 건물 집중됐던 마을… 대정 돌하르방 7기 산재
"대정현성 서문 등 조속히 복원 관광자원화 했으면"
제주도기념물 '대정성지' 국가문화재로 승격 기대



대정고을 성담 위에 올라 안쪽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옛 모습을 상상하며 수군거리는 이 소리를 듣기 위해서다. '거을물이 마르는 것을 보니 이번에 온 현감이 탐욕스러운 모양이다. 청렴한 현감이 오면 물이 콸콸 솟아나는데 말이야.' 얼마나 지혜로운 백성들의 견제장치였던가. 대정고을 백성의 기질이 녹아있다. 솟아나는 우물을 빌어 현감의 청렴을 강제하고 있었던 것. 보성리는 그 대정성의 서쪽 부분에서 시작하여 구억리와 신평리 사이를 따라 영어교육도시 지역까지 길게 올라가는 형태를 지니고 있다. 지명들 속에서 쉽게 발견하는 대정성의 흔적은 지워지지 않는 기억과도 같다. 예제기, 옥터, 창두골, 서뭇골, 사직단, 홍사문거리, 북문뒤, 염무창 등 대정현 산하 각 마을사람들이 드나들던 현장이 아니었던가. 주변 농경지의 비옥함과 탁 트인 시야를 확보하는 거점 지역에 읍성을 쌓은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마을 공동체의 중심지로 생활용수와 농업용수로 사용했던 붕우룻물.

이충부(72) 노인회장이 설명하는 설촌의 역사는 이렇다. "역사적으로 기록되기 이전부터 속칭 '두레물'이라는 지하수가 솟는 샘을 중심으로 취락을 형성해 왔다고 합니다. 탐라기년에 의하면 고려 충렬왕 25년 동서도현(東西道縣)을 설치하던 당시 산방이라 불리었지요. 조선이 개국되고 태종 16년(1416)에 대정(大靜)·정의현(旌義縣)을 신설하면서 섬 제주의 서부지역 중심지가 됩니다. 당시 대정현의 성내(城內)의 주요 관아 건물과 동헌(東軒)이 우리 마을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선조 중엽에 동성리(東城里)와 서성리(西城里)로 대정고을을 칭명(稱名)하여 고종(1864) 초까지 불리어 오다가 동성리는 인성리(仁城里)와 안성리(安城里)로 분리되고 고종 24년(1887)에는 서성리가 보성리(保城里)로 개칭된 것입니다." 대정성에 관한 기록들에 엄청난 관심과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자긍심의 발로라고 생각하면서.

주택 마당에서 대정성 복원 공사가 중단된 모습은 보성리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대정성(大靜城)은 조선 태종 16년(1416)에 대정현이 분립되어 초대 현감 유신(兪信)이 태종 17년(1417)에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축성하였는데 둘레 4890척, 높이 10척, 타첩 155개이고 동·서·남문에 각각 문루(門樓)가 있었고, 선조 때에는 옹성과 포대를 더하였고 동서남문 앞에 돌하르방 각 4기씩 설치하였다. 지금 남아있는 12개의 대정 돌하르방 중에 7기가 보성리에 서있다. 성 안 건물로는 영안관(瀛安館), 윤경당(潤經堂), 청풍당(淸風堂), 향사당(鄕社堂), 군관청(軍官廳), 인리청(人吏廳), 현창(縣倉), 군기고(軍器庫), 기패청(旗牌廳) 등 현의 치정을 위한 관아가 있었고 향교(鄕校)도 처음에는 성 안에 있었다가 효종 4년(1653) 단산(簞山) 남쪽으로 옮겼다. 대정성은 방형에 가까운 직선으로 축성되어 둘레는 약 1260m이다. 특히 북측 성벽은 당시의 축성법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문화재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성벽의 높이는 2.8m∼3.7m이고 상부의 폭은 2.7m∼3.1m로 현무암을 다듬어 혼합하면서 하부와 상부의 돌 크기가 거의 같게 쌓아 올렸다. 이러한 외형적 모습이 500년을 이어오면서 이 성을 중심으로 생활권이 만들어지고 제주목과 정의현과는 다른 문화의식이 흘러오게 된 것이다. 세포의 핵과 같은 대정문화권의 중심 역할을 해온 역사의식의 공간으로 바라봐야 한다. 그 가치를 문화재적 관점에서 자원화하기 위한 노력이 문화재청과 함께 서귀포시에서 '대정성지 복원 종합정비계획'이 추진되다가 행정관청과 주민 간의 견해 차이를 좁히지 못해 답보 상태에 놓여 있는 현실이다.

강용필 이장

강용필(57) 이장이 설명하는 숙원사업과 당면 과제는 대정현성 복원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성담의 경우 서문이 있었던 보성리 구간이 복원되지 못한 실정입니다. 조속하게 완료시켜야 합니다. 여러가지 극복과제가 있습니다만 궁극적으로는 대정현성의 성곽 안쪽의 경우는 옛 모습을 그대로 복원하여 관광자원화 해야 합니다. 성 외부에 일정한 지역을 마련하여 복합적인 주거생활공간을 건설해주면서 재산권에 대한 보상 문제를 협의하기 시작한다면 희망적인 결과가 도출되리라고 생각합니다." 현감이 있던 시절에는 성 안에 살면서 성 밖 농경지로 일하러 나갔지만 대정성이 복원된다면 성 밖에 살면서 관광자원화된 성안 일터로 출근하겠다는 생각. 조상들의 숨결을 다시 들이마시며 살 수 있는 방법이며 후손들에게 선조들의 정신을 우리 세대가 물려 줄 수 있는 현실적인 해법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를 위해 선결 과제가 '도지정기념물 12호'라는 대정성지 위상을 성곽 내부 지역까지 포함하여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제주지역 역사문화관광의 중심지로 거듭나기 위한 산고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을 어르신들의 공통적인 견해는 보성리 만이 아니라 안성리와 인성리 주민들의 슬기가 모아지면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추사 김정희유배지가 국가 사적 제487호로 지정되어 있는 것처럼 성안 전체를 문화관광자원화 하자는 의지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조영애(59) 부녀회장에게 보성리 후손들을 위해 가장 중요한 사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지 물었다. "도서관을 크게 만들어서 대정지역 인근 마을에서까지 보성리에 와서 책을 보고 빌려가는 모습을 만드는 것이 가장 보람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정읍의 역사적, 정신적 중심지라는 것을 도서관의 기능 속에서 유지시키기 위한 것이지요." 사려 깊은 주장이었다. 자부심을 물려주고 싶은 어머니의 마음이기도 하다.

추사선생의 글씨체 옆으로 생존의 도구였던 방앗돌이 돌하르방과 함께 놓여있다.

고영호(41) 청년회장에게 71세가 되는 30년 뒤 무엇을 하실 생각이냐고 물었다. "완벽하게 복원돼 차가 드나들 수 없는 대정성 안에서 문화해설사를 하고 있을 것입니다." 자식들이 성 안에서 기념품점을 운영하는 모습까지 꿈꾸고 있었다. 보성리의 운명은 주민 스스로의 것. 조상이 물려준 대정현성 모두가 후손들이 일하며 살아갈 '역사문화관광의 밭'으로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다. 성담이 그 밭담이 된다.

<공공미술가> <인터뷰 음성파일은 ihalla.com에서 청취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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