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훈의 제주마을 탐방](18)애월읍 상가리

[양기훈의 제주마을 탐방](18)애월읍 상가리
  • 입력 : 2014. 12.02(화)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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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내려앉은 애월읍 상가리 마을과 한라산(위), 고내봉 남쪽 풍경(아래)

난개발보다는 자연과 어울린 소박한 주민참여형 개발 희망
대정현으로 가던 목사·관리들 제주서 서문을 나와 쉬던 곳
족은바리메오름 인근 목장
마을에서 소유권 등기 못해 제주도와 소송중 "안타까워"
마을에서 농협창고 인수해 서예·서당·도자기 체험하는 문화공간 만들어 예술의 씨




오름으로 지경을 찾으면 노로오름 북서면에서 시작하여 안천이오름, 족은바리메오름을 지나 남고북저형으로 고내봉까지 길게 뻗어 내린 마을이다. 700년의 역사를 이어오면서 더럭이라는 마을 명칭으로 불리어 왔다. 고내리에서 분리하여 더럭마을이 되었다고 하니 상가리와 하가리를 합하여 더럭이라고 지칭한다. 동네 어르신들은 상가리보다 상더럭이라고 마을이름을 소개하는 경우가 있다. 동동과 서동, 원동 세 개의 동네가 합하여 상더럭을 이루고 살아왔다. 세종 26년의 기록을 보면 더럭마을이 얼마나 중요한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목사를 비롯한 관리들이 대정현으로 가기 위하여 제주성 서문을 나와 처음 쉬어가는 원참(관영여관)이 있었던 곳이 더럭이다. 사람이 많이 살았다는 이야기도 되고.

지명을 살펴보면 상가리가 어떤 지형을 이루고 있는 마을인지 환하게 보인다. 갈치모를, 배기모를, 남다니모루, 벡이모를, 허댕이모들 등 수없이 많은 언덕배기와 물혹동산, 웃세미동산, 등지거리동산, 남생이동산, 개아진동산 등 온통 동산들로 이뤄진 마을이다. 제주어로 머들이라고 하면 돌무더기가 동산처럼 쌓여있는 모습을 지칭하는 것다. 대머들, 고래머들, 감은머들, 대수머들 등과 같이 많은 머들들이 널려있다. 높은 곳이 있으면 낮은 곳도 있는 것이 이치라서 구릉진 곳을 이르는 지명들로 정겨운 마을이다. 오르막길들과 내리막길들이 수많은 동산과 머들, 구릉과 밭 사이를 굽이굽이 돌아간다. 조상 대대로 생활의 터전을 짜들어간 신경망이다. 높낮이에 따라 시점이 바뀌고 다가오는 풍광은 변화무쌍한 것. 상가리를 하루종일 걸어다녀도 싫증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엄청난 자산이다. 곡선이 지닌 공간적 미학이 아직도 생명력을 유지하는 마을. 도시의 효율적 직선에 지친 사람들에게 이 비효율적인 여유는 상품가치다. 주거 공간들이 많이 자리잡은 마을길에 있으면 북쪽에 있는 고내봉과 남쪽에 개기모들과 같은 동산들이 품어주는 느낌을 받는다. 안온하다. 바람과 싸워야 했던 조상들의 지혜가 여기에 있다.

애월읍 바리메오름 부근의 상가리 공동목장.

이 평화로운 마을이 지금 황당한 일을 당하고 있다. 상가리 공동목장을 가지고 소송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1919년 이후 조선이 보유하던 관영목장들은 목마장이 있던 마을 단위로 나뉘어졌다. 상가리 또한 이에 해당되었기 때문에 마을공동 목장을 관리 운영해왔다. 오랜 세월 옆 마을 사람들도 상가리 공동목장이 어디서부터 어디인지 알고 살아왔다. 그런데 해발 600m 족은바리메오름 인근 21만 여 평을 초기에 소유권 등기를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북제주군 시절에도 일제강점기 등기자료를 바로잡아주지 못하고 있었다가 특별자치도가 되면서 도유지로 변경된 것이다. 오랜 세월동안 목장의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힘든 노동을 마다하지 않았던 지역주민들의 입장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상가리 마을공동목장을 생존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너무도 생소한 용어로 용도지역은 변경되어 있었다. 생산관리지역, 관광, 휴양개발지역. 저 높은 목장지대에 관광개발을 허용한 사람들은 과연 누구인지 주민들은 궁금해하고 있는 것이다. 거대 자본이 관광개발을 위하여 도유지라고 생각하고 덤벼든 상황에서 상가리 주민들은 마을공동목장이기 때문에 소송을 해서라도 실소유주를 따져보자는 내용이었다. 참으로 후세에 부끄러운 재판이다. 실질적으로 상가리 공동목장이라고 하는 것을 행정이 몰랐을 리 만무했을 것이다. 이를 등기시켜 주려는 노력을 했어야 했다. 직무유기에 가깝다. 단지 지적도에 군유지요, 도유지라는 이유로 주민과 소송을 하는 행정. 이 재판에 이기려는 도정은 협치를 주장할 자격이 없다. 주민과 싸우는 협치는 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협치가 아니니까. 지금도 소송중이다. 제주의 역사가 이 재판을 주시하고 있다. 법 위에 상식이라고 했다. 만일 제주특별자치도가 법적 승리를 거둔다면 거대 자본을 가진 개발업자를 대신하여 이긴 결과가 되는 것이다. 그런 수치스러움을 향하여 민선6기 제주도정은 달려가고 있는 것인지 묻고 또 묻는 상가리 주민들.

마을에서 농협창고를 인수해 만든 문화곳간.

분노를 삼키며 마을 안길을 걸어가다 보면 문화곳간이라고 하는 공간을 만난다. 마을에서 농협창고를 인수하여 서예와 서당, 도자기체험과 같은 문화공간을 만들어 있었다. 작은 야외무대가 더욱 아름답다. 이렇게 살고 싶은 사람들이다. 농촌 현실에서 밭에만 씨를 뿌리는 것이 아니라 문화에도 예술의 씨를 뿌리고 거두며 살고 싶은 것이다.

강종우 상가리장

그렇다고 관광개발에 대한 의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양홍필 개발위원장은 마을 소유 개기모를 동산과 같은 곳에 주민들이 참여하는 공원형 숙박시설 같은 것을 작게 만들어 주민들의 문화, 복지를 위한 돈을 벌고 싶다고 했다. 대규모 난개발이 아니라 소박하면서도 자연과 벗하여 느낌을 공유할 수 있는 그런 상가리로 변모하고 싶다는 것이다. 유서 깊은 마을답게 군산이 물을 퍼다 마시던 마을공동체 정신을 발휘하고 있었다. 수령 500년이 넘는 상뒤폭낭 아래서 마을 총회를 해온 사람들의 땅 상가리. 그 모습을 그리고 싶어진다. 의논하고 또 의논하면서 공공의 선을 구축하기 위하여 힘겨운 노력을 마다하지 않았다. 미래를 열어가는 발걸음이 조금 느리다고 하지만 함께 손잡고 가고자 하는 아름다움이 녹아있는 마을이다. 30년 뒤, 상가리는 어떤 모습이 될 것인지 강종우 이장에게 물었다. "지금 333가구가 딱 2 배로 늘어나 있을 것입니다. 한 달에 평균 한 가구가 전입을 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오르막이 많은 곳이라 오르는 법을 아는 사람들이다. 천천히 올라야 힘을 낼 수 있다. 성장이라는 경사 또한 그런 것이 아닐까.

상가리의 최대자산은 해가 지고 난후 한 시간이다. 시제 감각이 지닌 가치. 수많은 동산에서 차분하게 마을에 내려 앉아가는 저녁의 고요를 만끽하게 된다. 파괴되지 않은 마을 경관이 있어 열리는 가능성이 이런 것이리라.

<공공미술가> <인터뷰 음성파일은 ihalla.com에서 청취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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