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주희의 하루를 시작하며] 우리는 모두 낯선 곳에서 온 사람이다

[권주희의 하루를 시작하며] 우리는 모두 낯선 곳에서 온 사람이다
  • 입력 : 2026. 09.09(수) 01:00
  • 권주희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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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제주에 살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곳에 오래 산 사람도, 얼마 전 이주해 온 사람도, 결국은 누군가에게 아직 낯선 존재라는 사실 말이다. 관계가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자리에서는 누구나 잠재적인 이주민인 셈이다.

스튜디오126에서 열리고 있는 김진아 작가의 개인전 '야생의 이주민이 나타났다!?'는 이러한 생각에서부터 출발한다.

작가는 이주와 정착을 반복했던 삶, 여러 공동체를 오가며 겪은 시간들, 그리고 가족을 돌보고 노동하며 살아온 나날을 오래도록 작업으로 풀어왔다. 이번 전시는 그의 경험을 단순한 장소 이동의 서사로 가두지 않고 이주를 하나의 상태로, 즉 관계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끊임없이 조정해 나가는 과정으로 확장한다. 장소가 바뀌면 나를 설명하던 이름과 역할, 관계의 문법도 예전처럼 작동하지 않는다. 낯선 환경에 놓인 몸은 주변의 소리와 움직임을 살피며 자신이 설 자리를 새롭게 더듬어 찾는다.

김진아에게 이러한 감각은 삶의 여러 얼굴과 맞닿아 있다. 부모의 자식으로, 한 아이의 엄마로, 아내로, 그리고 작가로 살아가는 하루하루는 저마다 다른 책임과 감각을 요구한다. 출산과 돌봄, 가족의 병, 반복된 이주는 그 역할들이 얼마나 자주 자리를 바꾸는지를 선명하게 드러낸 시간이었다. 초기 작업이 공동체 안에서 반복되는 사건과 감정의 구조를 관찰했다면, 최근 작업은 그 구조를 통과하는 몸과 감각 쪽으로 시선을 옮긴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먼저 '상태창'이 관객의 위치를 비춘다. 이어지는 '채집보관소'에는 씨앗과 작물, 작업복과 드로잉처럼 한 존재가 낯선 환경을 통과하며 익혀 온 감각의 흔적들이 놓인다.

고객은 자신만의 생존 기술과 오늘 떠오른 질문을 남길 수 있고, 이 기록은 전시가 끝난 뒤 '생존기술 도감'으로 다시 엮인다. 메인 공간에서는 대화와 흥얼거림, 몸속 소리와 숲과 바다의 소리, 일상의 소음이 한데 뒤섞여 새로운 풍경을 만든다.

작가가 오래 붙들어 온 '관절'이라는 개념도 눈여겨볼 만하다. 관절은 서로 다른 자리를 이어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지점이다. 가족과 개인, 노동과 돌봄, 이동과 정착 사이의 긴장 역시 그 틈에서 드러난다. 작가가 제시한 'Lv.0'은 익숙한 역할을 잠시 내려놓고 주변을 다시 살피는 출발점을 뜻한다.

전시명에서 '야생' 역시 자연과 문명의 경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규칙과 관계가 아직 충분히 자리 잡지 않은 환경, 그 안에서 주변을 살피고 필요한 것을 모으며 자신의 방식을 새롭게 익혀가는 과정을 뜻한다.

우리가 지닌 생존 기술이란 결국 낯선 자리에서 조금씩 익혀 온 관계의 방법일지 모른다. 아직 규칙이 정해지지 않은 자리에 설 때, 비로소 서로를 새롭게 감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감각은 우리가 매일 마주치는 낯선 얼굴들 앞에서 조용히 이어진다. <권주희 스튜디오126 대표·독립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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