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도립미술관 기획전에 윤석남의 '빛의 파종' 등이 전시되어 있다. 진선희기자
[한라일보] 관람객들은 전시장 맨 끝 '에필로그' 방에서 오래도록 머물렀다. 짧은 분량의 영상이었지만 화면을 응시하며 나혜석(1896~1948)의 삶을 만나는 모습이었다. 나혜석은 결혼과 이혼 과정을 겪으며 아내도 딸도 어머니도 아닌 온전히 '나'로서 자신을 드러내려 했던 작가다. 그 대가는 컸다. 사회는 '정상'의 경계 바깥에서 살기를 택한 이를 반기지 않았다. 지금 여기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나혜석은 오늘의 우리에게 그런 질문을 던지는 듯했다.
지난 8일 제주도립미술관 기획 전시실. 나혜석의 목판에 유채 작품 '시홍 녹동 서원'(1929~1930)에서 박주애의 설치 '겨우살이'(2026)까지 국내외 여성 작가 19명이 참여해 '경계 위의 그녀'란 이름 아래 1~2층 전시실에 60여 점을 펼쳐놓았다.
'활의 춤-백만 번의 숨'(2025)으로 이 전시에 참여한 제주 박진희 작가는 "여성의 돌봄과 노동, 죽음 위에서 다시 살아낸 4·3의 시간 속에서 호명되지 못한 역사의 '뒷풍경'에 집중한다"고 했다. 이 말을 빌린다면 '경계 위의 그녀'로 묶인 작품들엔 그 이름이 불리지 못한 여성 또는 비가시적인 존재들이 버텨온 시간이 흐른다.

4·3의 시간 속 지워진 존재들의 목소리를 말하는 박진희·연미의 작품. 진선희기자
929개의 조각에 주변부로 밀려난 여성들의 이야기가 담긴 듯한 윤석남의 설치 '빛의 파종'(1997), 낡은 앞치마 위에 지쳐 누운 여성을 형상화한 정정엽의 '몸살'(1994), 숱한 여성들의 희생과 헌신이 떠오르는 김인순의 '땅에는 천의 여성이'(2004), 남자들은 알아듣지 못한 몸짓을 꺼낸 박영숙의 '미친년 프로젝트-꽃이 그녀를 흔들다 #14'(2005) 등 뒤편에 자리했던 이들의 사연에 귀 기울여온 작가들은 현실과 자기 인식, 사랑과 치유를 아우르며 중심부에서 배제됐던 서사를 풀어낸다. 어머니의 편지글이 더해진 문지영의 '가장 보통의 존재'(2015) 등에는 장애인, 난민 등 지워진 사람들이 있다. 여기서 나아가 홍영인의 사운드 설치 '우연한 낙원'(2025)은 인간과 동물, 언어와 비언어 사이의 경계를 가로지른다.
전시장엔 호박 시리즈의 작가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도 따로 모았다. "나는 내 강박을 정면으로 마주함으로써 스스로를 치유했습니다"라는 작가의 말 아래 개인 소장 '스타리 펌프킨'(2020), 리움미술관 소장 '점의 집적'(1995) 등 4점이 놓였다.
미술관 측은 이번 기획전에 대해 "그동안 음지에 묻혀 있던 목소리를 복원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여성과 남성, 우리 모두의 삶과 역사를 보다 온전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갖게 할 것"이라고 했다. 전시는 8월 2일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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