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12일 진행된 '2025 제주섬 글로벌 에코투어 2차 행사' 참가자들이 한라산 중턱 삼나무가 우거진 숲길을 걷고 있다. 정은주 여행작가
민모루~거린사슴 잇는 생태 여정으름난초… 숨어 있는 자연과 조우중문천궤·상잣성서 고된 삶 흔적도
[한라일보] 지난달 12일 '2025 제주섬 글로벌 에코투어' 두 번째 탐방이 진행됐다. 이날 비가 예보된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30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여 에코투어에 대한 높은 관심을 보여줬다. 첫 회에 이어 재참가한 반가운 얼굴들도 눈에 띄었다.
이번 코스는 한라산 남서면 중문천 지류를 따라 걷는 길이었다.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고 오히려 숲 안은 선선함이 감돌았다.
첫 출발지인 한라산버섯연구소는 표고버섯 재배지로 번성했던 곳이다. 사유지이지만 사전에 양해를 구해 민모루오름 들머리까지 여유로이 이동했다. 한적한 숲길은 곳곳에 쌓인 표고목을 제외하면 사람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따로 길 표식이 없기 때문에 앞사람을 놓칠 새라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는 사이 어느새 민모루오름에 닿았다. 민모루오름은 해발 882m, 높이 82m에 달하지만 여느 오름과 달리 봉우리가 평평해 마치 평지처럼 보인다.
전망은커녕 철탑 하나 우뚝 서 있을 뿐이지만 민모루오름과 돌오름 사이에 중문천 최초 발원지가 숨어 있다. 비록 경관적인 가치는 없어도 지형학적으로 중요한 오름인 셈이다.
인적 드문 숲은 온통 조릿대 차지다. 발목부터 허리춤까지 높낮이를 달리해 자라난 조릿대들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조릿대를 헤쳐 나갈 때마다 사그락 사그락 숲 속에 파도소리가 흘러넘친다. 여기에 섬휘파람새와 두견새 등이 호로롱 거리며 하모니를 이뤄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어 줬다. 조릿대 너머로는 갖가지 나무들이 탐방객을 반겼다. 가장 많이 보이는 굴거리나무는 유난히 붉은 잎자루와 사철 푸른 잎이 특징이다. 봄철 새 잎이 날 땐 원래 있던 잎이 고개를 숙이며 자리를 내준다. 고단한 삶을 살아온 제주 여인들의 애환을 담은 민요의 소재로도 등장한다. 탐방 내내 굴거리나무가 가야 할 길을 인도해 줬다.

굴거리나무

좀비비추

기름나물

하늘말나리

으름난초
도민들의 식탁에 자주 오르는 양하(양애) 군락지를 지나 중문천 지류 숲길로 들어섰다.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숲 안쪽에 도시락을 펼치고 쉬어가는 시간, 멸종위기 야생식물 2급으로 지정된 으름난초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열흘 전 사전답사 때는 꽃이 펴 있었는데 이날은 '으름'처럼 생긴 열매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그래서 으름난초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쉽게 보기 힘든 귀한 식물을 우연찮게 만나다니, 왠지 모르게 행운이 따른 듯한 기분이었다.

산수국

개감수

무엽란
중문천 궤에 이르자 오래전 용암이 흘렀던 기암계곡이 펼쳐졌다. 달리 말하면 '불로 빚어낸 물길'인 셈이다. 특히 '궤'는 용암이 흐르다 천장이 무너져 생긴 독특한 화산지형인데 동굴처럼 움푹 파여 제주 4·3 당시 피신처로 사용되기도 했다. 지금은 물기 하나 없는 계곡이지만 비가 한꺼번에 쏟아질 땐 물이 넘쳐나며 쿠르릉거리는 소리까지 난다고 한다. 이런 때 제주 사람들은 '내가 터졌다'고 표현한다. "한라산 지대는 연평균 강우량이 4000㎜일 정도로 비가 많이 오지만 대부분 숨골을 통해 지하로 스며듭니다. 평소 하천들이 건천인 이유죠. 빗물이 여러 지층을 거쳐 가장 맑은 상태로 대수층까지 도달하는데 약 20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이를 뽑아 올린 것이 바로 삼다수고요." 길잡이를 맡은 김영삼 자연환경해설사가 자세하게 설명해 줬다.
한라산 자락을 따라 중문천을 이룬 물길은 천제연 폭포를 거쳐 중문 앞바다로 이어진다. 1단 폭포는 비가 와야만 볼 수 있고 2·3단 폭포는 용천수가 솟아나기 때문에 언제든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를 만날 수 있다. 계곡을 따라가던 길이 다시 넘실거리는 조릿대 밭으로 변했다. 이내 상잣성 흔적이 남아 있는 거린사슴 숲길로 접어들었다. 상잣성은 말을 방목하던 시절 한라산 고지대에 돌담을 쌓아 경계를 정했던 제주 목축문화의 상징이다. 얼기설기 쌓아 올린 돌담마다 깊은 산속까지 들어와 말을 키우고 살았던 옛사람들의 고된 삶이 엿보이는 듯했다.
마지막 목적지는 거린사슴오름 정상이다. 짙은 안개가 주변을 뒤덮어 평소와 다른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내려오는 길목에 아직 보랏빛 꽃잎을 펼치고 있는 산수국이 작별 인사를 건넨다. 걸음마다 한라산이 품은 제주의 속살을 느낄 수 있었던 여정이었다. 길은 끝났지만 길 위에서 만난 풍경들은 마음 깊이 새겨졌다. <정은주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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