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북 포구는 조선시대 조천 포구와 더불어 제주의 관문역할을 했던 곳이다. 제주를 오가는 관리나 유배인들이 대부분 이 곳을 통해 제주섬으로 들어 왔다. 늘 만남과 이별의 정한이 넘실거렸던 화북포구는 옛 이야기만 남긴채 빈배 몇척만 한가롭다. /사진=이승철기자 sclee@hallailbo.co.kr
1678년 최관목사 때 환풍정 등 鎭城 설치왜구의 침입 격퇴 위해 중무장 했던 요새
이형상(1653~1733) 목사가 남긴 '탐라순력도'는 1702년 그가 제주도를 한 바퀴 순력한 내용을 글과 그림으로 남긴 소중한 기록이다. 지금부터 약 300년 전 제주 산천과 유적의 모습을 파악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다. 그 속에는 '호연금서(湖然琴書)'라는 그림이 나온다. 이 목사가 제주목사로 부임할 때 한라산을 바라보며 호연한 마음으로 거문고를 타며 책을 읽었던 장면을 묘사한 내용이다. 그림에는 깃발을 단 배를 두척의 배가 앞 뒤로 호위하듯 포구로 향하고 있다. 그림 왼쪽에는 삼양의 원당봉, 오른쪽에는 사라망(紗羅望)이 보이고, 가운데는 별도(화북)포구와 화북진성(鎭城)이 위치해 있다. 별도포구는 둥그런 형태로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간 천연의 포구임을 보여주고 있다. 포구 북쪽 머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바로 이 목사의 부임을 마중나온 환영객들이다. 탐라순력도가 관내를 순력한 공식 기록이면서, 한편으로는 이 목사의 제주기행을 담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해상활동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1829년 처음 지어져 중수를 거듭한 화북포구를 지키고 서있는 사당인 해신사는 조선조 제주의 관문이었던 화북포구의 성격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그림=강부언
별도 포구는 조선시대 조천포구와 더불어 제주의 관문역할을 했던 곳이다. 제주를 오가는 관리나 유배인들이 대부분 이 곳을 통해 제주섬으로 들어 왔다. 탐라국시대에 제주의 관문은 건입포구였다. 그런데 왜 조선조에 들어오면서 제주성에 가까운 건입포구 대신 별도·조천포구가 관문으로써 각광을 받게 된 것일까. 이를 시원스럽게 밝혀 주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단서가 될 만한 시대적 배경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여말선초(麗末鮮初)에 제주에는 왜구의 출현이 빈번하게 나타난다. 고려 충숙왕(1323) 6월 추자도에, 충정왕(1350)에는 정의에 침입했다. 또 공민왕 원년(1352)에는 우포(지금의 용수리), 공민왕 8년(1359)에는 대촌(지금의 제주시)을 침범하기도 했다. 우왕 2년(1376)에는 왜구 600척이 제주 온 섬에 침입하자, 성주(星主) 고신걸(高臣傑)이 방어했는가 하면 우왕 3년에는 또 다시 왜구 200척이 제주를 침범하였다고 한다. 고려말 제주에 봉수를 설치하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조선조에 들어선 뒤 세종 때 제주도의 관방시설은 대대적으로 정비된다. 기존에 있던 9개의 방어소와 봉수 등을 크게 보수하고, 왜선이 정박할 염려가 있는 21곳에 잡색군인을 50~60명씩 배치해 방어하도록 했다.
이처럼 왜구의 침입에 대비한 방어체제를 구축해 나갈 무렵, 명종 10년(1555)에 을묘왜변이 발생했다. 이 때의 왜변은 단순한 약탈의 성격을 떠나 제주도를 왜구의 본거지로 삼으려는 계획적인 침략이었다고 한다. 1000여명의 왜구는 60여척의 배에 분승, 화북포를 거쳐 제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3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김수문 목사를 중심으로 한 민·관·군에 의해 격퇴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주읍성과 맞닿아 있는 건입포구로 많은 배들이 오가는 것은 방어에 적절치 못할 수도 있다. 선박의 구별이 쉽지 않아 왜구가 침입할 경우 방어에 필요한 시간이 없어 다급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주로 들어오는 배들은 건입포구가 아닌 화북이나 조천포로 출입토록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화북진성은 숙종 4년(1678) 최관 목사에 의해 설치됐다. 성의 규모는 길이가 606척, 높이 11척으로 동문과 서문이 있었다. 숙종 25년(1699)에는 남지훈 목사가 객사인 환풍정을 짓고 북성 위에는 망양정을 건립했다. 이원진의 '탐라지(耽羅誌)'에는 진성의 무기고에 교자궁, 장전, 편전, 환도, 지자총, 현자총, 주자총, 승자총, 화약, 수철환, 처갑, 철모 등 많은 무기들이 비치돼 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화북진성이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시사하는 자료다. 영조 11년(1734) 김정 목사가 포구 확장공사를 벌였다. 목사 자신이 직접 돌을 등짐으로 나르면서 독려했다. 이 공사가 마무리 될 무렵 목사 임기를 마치고 이임하게 되었다. 그런데 포구 공사로 과로한 것이 화근이 되어 환풍정에서 숨을 거두었다. 김정 목사는 제주의 유서 깊은 유적을 복원정비하고 산지천을 하나의 도시공원처럼 가꾸었던 선각자이기도 했다. 화북진성은 1926년 화북사립보통학교가 들어선 이후 1971년까지 학교가 들어섰다가 지금은 청소년수련관 등이 들어서 있다.
만남과 이별의 무대 별도(別刀)포구
사람들을 떠나 보내는 포구는 이별의 정한이 서린다. 조선시대 별도(화북)포구도 제주로 들어오는 손님을 맞거나, 육지로 떠나는 이들을 보내기 위해 전송나온 이들로 늘 넘실거렸다. 한쪽에선 재회의 기쁜 눈물을, 다른 쪽에서는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이를 보내야 하는 석별의 슬픔이 뒤섞여 있다. 화북진성에 있었던 환풍정(換風亭)은 관리들이 육지로 배를 띄우기 앞서 묵었던 객사다. 북성 위의 망양정(望洋亭)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순풍과 물때를 기다렸다.
조선조 관리들의 위선을 질펀한 풍자로 그려낸 '배비장전'(裵裨長傳)의 첫 막을 여는 무대도 별도포구였다. 임기를 마치고 육지로 떠나려는 정비장과 제주 기생 애랑이가 별도포 망양정에 올라 이별을 앞둔 회포를 풀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결국 정비장은 그동안 모은 자신의 모든 재물을 내어주고 이별하려 했으나 사랑의 징표로 몸에 지닌 것을 달라는 애랑의 말에 이빨까지 뽑아 주어야 했다. 본 무대는 이 장면을 보며 혀를 차는 신임 배비장이 방자와 내기를 걸면서 흥미를 더한다. 기생과 술자리를 멀리하면서 홀로 깨끗한 체하던 배비장은 결국 목사와 애랑이, 방자가 함께 꾸민 계교에 의해 동헌 앞마당에 알몸으로 허우적거리는 망신을 당하며 막이 내린다.
'배비장전'은 작자 미상의 소설로 원래는 판소리 12마당의 하나를 소설로 개작해 1915년 발간된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시대 관료들의 허세와 위선을 풍자한 대표적인 희극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배비장전'의 무대가 되는 별도포구와 방선문계곡, 제주목관아를 잇는 문학의 현장을 기행한 '배비장전'극(劇)을 감상할 수 있는 명품 관광상품은 언제면 볼 수 있을지 아쉽다.
별도포구의 눈물겨운 사랑과 이별의 장면은 임제의 '남명소승'에도 나타난다. 뱃일로 살아가는 제주의 남정네들은 거친 풍랑으로 물에 빠져 죽어 돌아오지 않는 이가 많았다. 그래서 늘 남자가 적었다. 그래서 짝을 찾지 못한 시골여자들은 매년 3월 육지에서 교대하기 위해 새 군인들이 들어올 때면 화장을 곱게 하고 술을 들고 별도포구로 나간다. 그래서 서로 가까워지면 집으로 맞아들여 같이 살게 되는데 군인들이 임무를 마치고 돌아갈 때면 포구에서 눈물로 이별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1577년 임제가 제주에 내려 왔을 때 보고 들었던 이야기다. 이처럼 늘 만남과 이별의 정한이 넘실거렸던 별도(화북)포구는 옛 이야기만 남긴채 빈배 몇척만 한가롭게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