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100년' 제주 원풍경을 되살린다](8)이아동헌(二衙東軒) 터

['경술국치 100년' 제주 원풍경을 되살린다](8)이아동헌(二衙東軒) 터
판관 政事 보던 곳… 100년간 제주의술 구심체
  • 입력 : 2009. 04.13(월) 00:00
  • 강문규 기자 mgkang@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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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동헌은 목관아에 버금가는 관아터로 판관이 머물며 일을 했던 곳이다. 그후 한말부터는 제주도립병원, 의료원에 이어 제주대병원으로 사용됐다. /그림=강부언 화가(한국화)

고려시대 설치된뒤 갑오경장때 폐지돼
판관이 목사 대행… 애환서린 역사현장


간혹 20세기 전후 시기에 제주의 모습을 찍은 옛 사진을 만날 때가 있다. 제주시 관덕정과 그 주변은 쇠퇴하던 국운을 상징하듯 건물들은 낡고 거리는 겨울비 맞은 나무들처럼 초췌하고 쓸쓸한 느낌마저 준다. 이러한 현상은 그 당시 제주도가 처한 대내외적 현실과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19세기에서 20세기 전반기 제주에는 많은 민란이 발생했다. 이는 17세기 이후 지식인층에서부터 실학과 개화시상이 태동하고 있는 가운데 오랫동안 관에 억압당했던 농민들이 삼정의 문란에 분격하며 스스로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자각과 자구의 몸부림이었다. 1813년 (순조13) 제주인 양제해 등이 중심이 된 민란기도사건을 시작으로 1862년(철종13) 강제검, 김흥채 등이 주동한 임술농민봉기, 1890년(고종27)에는 김지가 주동한 경인민란, 1896년(건양1)에는 강유석과 송계홍 등이 주동한 병신민란, 1898년(광무 2)에는 방성칠이 일으킨 무술민란이 일어났다.

 이러한 민란이 일어날 때마다 민과 관이 대치하고 인명이 희생되는가 하면 많은 문서들이 불태워지는 등 제주성안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그래서 제주목관아를 중심으로 한 삼도동 일대는 숱한 사연이 가는 곳마다 깔려 있다.

 현재 구 제주대학교병원이 있었던 이아(二衙)터(제주시 삼도2동 154번지 일대)도 그런 역사의 현장이다. 이아는 목관아에 다음 가는 관아라는 뜻이다. 제주목사가 집정하는 곳이 목관아라면 이아는 목사의 부관격인 판관이 정사를 맡아 보는 관아였다. 지금으로 보면 제주도청 2청사라고 할 수 있는데, 제2인자인 판관이 머물며 정사를 보았던 관아라는 점에서 약간 성격을 달리한다고 하겠다.

▲이형상 목사가 남긴 탐라순력도에 그려진 제주판관이 정무를 보던 이아동헌의 옛 모습. 이아동헌은 '찰미헌'으로도 불렀다.

 제주에서 목사와 판관이라는 경직이 파견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 충렬왕 21(1295) 제주의 행정 단위가 제주목으로 개편되면서 부터다. 이 때부터 목사와 부사, 그리고 속관층에 속하는 판관 등이 정규직으로 오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전 제주가 원의 직할령이 되기 이전인 고종 10년(1223)부터 원종 14(1273)까지도 수령 부사(副使)와 더불어 판관과 법조 등 3명의 외관이 제주의 토착세력과 함께 제주를 다스렸다. 제주에 돌담축조에 기여한 김구(1211~1278)도 이 때(1234) 제주판관으로 내려 왔다.

 판관은 목사의 부관격이다. 행정체계상 제주목사가 정의·대정현 지역을 순찰시, 제주목에 관계된 사항을 대행하거나 혹은 목사가 공사로 시간이 없을 때 판관이 대신 일을 처리하면서 정의·대정현의 업무를 감독하기도 했다.

 그러나 목사는 문관, 판관은 무관으로 임명되었던 점을 감안하면 목사는 전반적인 행정을 총괄한데 비해 판관은 평시 군사분야에 치중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김녕사굴의 뱀을 죽였다는 전설에 판관 서린이 등장하는 것도 이런 역할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이아동헌이 언제 건립되었는 지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고려 고종 10년(1223)부터 판관이라는 직책이 제주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창건시기를 13세기로 추정할 수 있다.

 이형상의 탐라순력도를 보면 이아동헌을 중심으로 주변에 각종 관아시설이 배치돼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건물 역시 관덕정 같은 형태로 우람하고 격식을 갖추고 있다. 이아동헌의 이름은 찰미헌(察眉軒)으로 불리었는데, 1810년(순조 10) 손응호 판관이 중수했다. 1897년(광무 1)에는 김희주 군수가 다시 중수했다. 이에 앞서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일컬어지는 행정의 대개혁이 이루어지면서 제주목이었던 제주는 제주부(濟州府)로 개편되고, 관할에는 제주군, 정의군, 대정군을 두고 관할하게 했다. 부에는 관찰사, 참사관, 경무관을 각 1인씩 두도록 했다. 그럼으로써 고려 후기부터 6백여년 간 존속되었던 제주목사와 판관제도는 폐지케 되었던 것이다.

 이아동헌 찰미헌이 있었던 이아골에는 1910년 자혜의원이 설립된 뒤 광복 이후에는 제주도립병원(제주의료원)이 세워졌으며, 제주의료원이 산천단지역으로 옮기게 되자 그 자리에 제주대학교병원이 들어서더니 대학병원 역시 지난 3월 산천단지역으로 이설되었다. 이처럼 지난 100년간 도민과 애환을 같이 하며 제주의 근·현대식 의술을 펴 왔던 보금자리도 이제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구대학병원' 종합적 시각서 접근해야

 이아동헌이 있었던 구제주대학병원은 지금 삼도동은 물론 제주시민들의 관심이 쏠려 있는 현장이다. 한말부터 현재까지 100년간 제주를 대표하며 이어져 왔던 의술기관의 전통과 명맥이 단절될 위기에 처하면서 주변상가는 벌써부터 침체의 조짐을 뚜렷이 보이고 있다. 주변 상인과 주민들은 제주자치도와 제주대학교에 상권회생을 위한 대책을 요구하고 있지만 뚜렷한 대안은 제시되지 않고 있다. 다만, 병원시설을 도심캠퍼스 등으로 활용하자는 아이디어는 시민들의 큰 공감대를 이루고 있다. 또 다른 대안은 없는 것일까.

▲1910년부터 100년간 제주도민들에게 의술을 펴는 구심적 역할을 해왔던 이아동헌터(구 제주대학병원). /사진=한라일보 DB

 이형상 목사가 남긴 탐라순력도 등의 자료를 보면 관덕정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좌위랑, 남쪽에는 우위랑이 동서로 길게 들어서 있었다. 좌위랑에는 나장(羅將), 역생(譯生), 모장(毛匠), 상장(床匠), 약방(藥房), 취수(吹手), 전장(箭匠), 궁장(弓匠), 기수(旗手) 등이 48칸의 건물에 들어서 있었다. 우위랑에는 영리청(營吏廳), 기패(旗牌), 군기(軍器), 아병(牙兵), 정갑(定甲), 지인(知印), 가솔(假率), 의국(醫局), 무학(武學), 마구(馬廐) 등이 있었다. 규모는 56칸에 이르렀다. 이처럼 목관아와 이아동헌 사이에는 제주의 모든 기·예능 공방과 함께 다양한 시설이 집결돼 있었다.

 관계기관과 시민들이 구대학병원을 도심캠퍼스 활용 측면으로만 접근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어차피 구도심권 재생을 위한 프로젝트가 추진되고 있다. 그렇다면 대학병원에만 초점을 두지 말고, 인근 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종합적인 시각으로 방안을 찾아야 한다.

 이 이아동헌 주변을 조선시대의 좌·우위랑의 전통을 잇는 역사·문화·관광거리로 조성하고, 언젠가는 이아동헌을 복원하는 방안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구상은 도심캠퍼스(구대학병원)-좌·우위랑-제주목관아를 동시에 살려 나가면서 구도심에 활력을 불어넣는 종합비타민과 같은 전략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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