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觀/ 극장의 시간들] 시간을 찾아서

[영화觀/ 극장의 시간들] 시간을 찾아서
  • 입력 : 2026. 03.16(월) 02:00  수정 : 2026. 03. 17(화) 12:32
  • 고성현 기자 kss0817@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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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극장의 시간들'.

[한라일보]   가끔은 시간을 재우려고 극장에 간다. 스마트폰에서 언제 울릴지 모르는 알림음들을 잠재워두고 뭐가 너무 많은 현재의 시간들을 컴컴한 극장의 이불 밑에 넣어두고 지금의 나와는 좀 떨어져 있는 스크린 속 이야기들을 마주보는 일은 이상하게도 분주한 일상에 환기가 된다. 때로는 나도 같이 잠들어 버리긴 하지만 그 몇시간이 이제는 영양제처럼 필요하다고 느낀다. 때로는 공항에 가는 기분으로 극장에 간다. 멀리 떠나고 싶은데 여의치 않을 때 먼 나라의 이야기를 보러 극장으로 향한다. 여름이 지겨울 땐 겨울 영화를 보러 가고 도시가 갑갑할 땐 자연이 가득한 영화를 보러 간다. 티켓 박스에 서서 관람할 영화의 이름을 호명할 땐 어쩐지 도착할 목적지의 이름을 대는 것 같다. 의자에 몸을 누이고 눈을 잠깐 감았다 뜨면 금세 다른 세상이다. 매번 다른 두근거림이 여행처럼 찾아 오는 곳이 극장이 아닐 리 없다.

사회 생활을 시작한 곳이 극장이라는 것에 남다른 친밀감을 느낀다. 한때 직장이었던 극장에서 그 극장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만들었다. 씨네큐브 개관 25주년 기념 앤솔로지 <극장의 시간들> 이야기다. 벌써 어언 20년 전의 이야기다. 당시 극장 사무실은 건물 8층에 있었고 극장은 지하 1층에 있었다. 사무실에서 극장에 상영할 영화들을 결정하고 시간표를 짠 뒤 틈틈이 극장에 내려갔다. 어떤 영화를 사람들이 많이 보러 오나, 보고 나온 사람들의 표정은 어떠한가를 살펴 보기도 했고 때로는 너무 피곤해 극장 속 어둠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다시 사무실로 복귀하기도 했다. 나는 관객이라는 손님을 맞는 호스트의 역할이었지만 상영관 안에 들어서면 바로 관객이 될 수 있었다. 그 경험은 오랜 잔상으로 남았다. 상영관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각기 다른 모두가 하나의 존재, 관객이 된다는 것.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어떤 공간에 몸 담던 다시 이 공간으로 들어서면 그때의 나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어쩐지 마법처럼 느껴졌다.

<탈주>와 <파반느>의 이종필 감독, <우리들>과 <세계의 주인>의 윤가은 감독, <한여름의 판타지아>와 <한국이 싫어서>를 만든 장건재 감독이 각각 다르지만 닮은 꼴의 영화들로 <극장의 시간들>의 러닝타임을 빼곡하게 채워 넣었다. 이종필 감독의 <침팬지>는 영화감독이 된 고도가 오래전 영화의 친구들과 영화와 극장을 사랑했던 시기를 떠올리는 영화다. 잊히지 않는 기억의 조각들이 퍼즐처럼 맞춰지며 마침내 희미했던 풍경에 빛을 들이는 이야기다. 윤가은 감독의 <자연스럽게>는 '자연스러운 연기'라는 감독의 주문에 맞춰 여름날 한때를 보내는 10대 여자 아이들의 시간을 따라간다. 활기와 생기 사이에 스며드는 작은 고요와 낯선 마찰음들마저 '영화가 되는' 누군가의 순간들이 고스란히 담겼다. 장건재 감독의 <영화의 시간>은 극장의 관객, 영사 기사, 극장 매니저와 극장 청소 노동자까지 극장이라는 공간을 함께 공유하는 이들의 시간들을 담아냈다. 우연한 만남의 공간이자 일상의 일터인 동시에 설렘의 무대가 될 수 있는 극장이라는 공간의 표정들이 다채롭고 뭉클하게 펼쳐진다.

지금도 씨네큐브라는 극장을 자주 찾는 관객이 나에게 <극장의 시간들>은 누군가가 다시 만들어준 졸업 앨범 같은 영화처럼 느껴졌다. 그 이유는 영화의 시작과 끝에 존재하는 홍성희 영사기사님의 모습들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내가 일하던 시절에도 여전히 영사실을 지키던, 필름 시대와 디지털 시대를 모두 겪은 영사 기사님이 극장의 커다란 스크린에 등장하자 무척 반가우면서도 이상하게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영화를 틀어주는 사람, 그 영화의 마지막 까지를 매번 기다리는 사람이 객석의 의자 뒤에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그와 그의 공간이 스크린에 등장하자 이 공간 전체를 관통하는 바람이나 파도 같은 흐름이 느껴졌던 것 같다. 일렁이고 출렁이는 그 움직임들이 극장의 시간을 통과해 객석 여기저기로 가 닿는 것 같았다. 각기 다른 사람들의 속내를 관객의 마음으로 돌려 놓는 곳,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어둠과 빛 속에서 짧고 긴 여행을 가뿐히 허락 하는 곳, 외로워도 슬퍼도 꾹 참고 이곳으로 향했던 이들이 마음 놓고 울 수 있게 해주는 곳. 박치기를 하지 않아도 들어갈 수 있는 마법의 승강장이 우리들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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