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관훈의 한라시론] 제주 중산간 마을의 논농사

[진관훈의 한라시론] 제주 중산간 마을의 논농사
  • 입력 : 2025. 12.11(목) 02:00
  • 고성현 기자 kss0817@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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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1653년 하멜이 스페르웨르호를 타고 일본으로 가던 중 태풍을 만나 배가 부서져, 서귀포시 대정읍 해안에 표착(漂着)했다. 배에 탔던 선원 64명 중 선장을 포함한 28명이 죽고 나머지 36명은 살아남았다. 이때 구사일생 살아남은 하멜은 제주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섬에는 사람도 많이 살고 식량도 많았다. 나무들이 우거져 있는 높은 산이 하나 있고 나머지 산들은 민둥산이 대부분이다. 계곡들이 많아서 그곳에서 쌀이 재배되고 있었다."

이러한 372년 전 하멜의 제주 표류기에서, 비록 건천이긴 하나 "계곡들이 많아서" 까진 이해 하겠지만, "그곳에서 쌀이 많이 재배되고 있다"라는 기록은 의외다.

예로부터 제주는 논이 전 경지면적의 2.0% 정도다. 서귀포시 하논, 강정, 법환, 월평, 사계, 신도, 제주시 외도천, 유수암 일부분만이 논농사 지역이다. 물론 18세기 이후 중문 천제연 하구, 화순 황개천 인근, 광령, 종달 등지에서 개답(開畓)이 활발해 한때 수전(水田)이 늘어났던 적은 있다. 그래서'일 강정, 이 번내(화순), 삼 도원(신도)'이라 했다.

제주에서는'나록'이라 불리는 논벼(수도)보다는'산디'라 불리는 밭벼(육도)가 더 많이 재배됐다. 제사나 명절 때 상에 '곤밥(쌀밥)'을 '메(젯밥)'로 올려야 해서 '곤쌀'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논농사 지을 만큼 물이 풍족하지 않은 지역에서는, 논벼 대신 밭벼를 심어 최소한의 후손 된 도리를 다하려 애썼다. 여기까지가 이미 우리가 아는 사실이다.

올해 제주개발공사의 지원을 받아 '제주지역 중산간 마을의 물 문화'를 조사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제주 중산간 마을에서도 큰 규모는 아니지만(크면 1000평 작으면 300평 정도), 늪지나 물통, 고인 지표수 등 천수(天水)를 이용해 논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용천수가 있는 유수암과 염돈만이 아니라 늪지와 물통이 많았던 선흘과 금악, 심지어 소(沼)와 저수지가 있던 영남동과 광평리 조가동 등지에서도 일부 계단식 논농사를 지었다.

다들 제주에서는 물이 풍부한 해안가 용천수 주변에만 마을이 형성됐으며, 물이 부족한 중산간 지역에서는 사람이 살기가 어려웠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중산간에도 연못, 우물, 봉천수, 집정수, 고인 지표수, 저수지 등을 이용해 마을이 있었다. 왜구 침입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하고 목축업을 기반으로 마을의 부(富)가 탄탄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 중산간 마을은 물 사정이 안 좋아 '촘항'에 고인 '촘물'을 아껴 쓸 정도로 물 절약 정신이 투철한 덕에 '멘주기(올챙이) 죽은 물'을 마신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상수도 보급과 중산간 개발로, 지금은 사라진 제주 선인들의 지속 가능한 물 관리 비법을 이번 제주개발공사의 덕분으로 다시금 되새길 수 있었다. 앞으로도 이런 사업이 쭉 이어져 청정 제주 지하수 관리에 대한 도민의식이 더 선진화됐으면 좋겠다. <진관훈 제주문화유산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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