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부터 공장 생활… 이름도 없이 살아온 고단한 유년기검정고시로 중·고 졸업, 중대 법대 장학생 입학·사시 합격시민운동으로 정치 출발… “감시보다 권한 행사 필요하다”모라토리엄 선언·부채 청산… 성남시 개혁 성공한 민선시장
[한라일보] 3일 치러진 제21대 대통령선거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승리하면서 국민의힘에서 더불어민주당으로 정권 교체가 이뤄졌다.
이재명 대통령 당선인은 궁핍한 가정환경과 비주류의 삶에 뿌리를 두고도 대한민국의 대통령직에 오르는 새 역사를 썼다. 13살 때부터 소년노동자로 일하며 공장에서 고된 노동을 버텨낸 그는 노동과 학업을 병행한 끝에 대학에 진학했고, 변호사가 된 뒤 노동 인권 변호사와 시민운동가로 활동하며 정치인 이재명의 토대를 일궜다.
l 13살부터 시작된 노동자의 삶
이재명 당선인은 줄곧 '누구도 탈락하지 않는 사회'를 꿈꿔왔다. 가혹한 가난 속에서 소년공의 삶을 겪으며 이러한 꿈을 갖게 된 것이다.

1980년 지하를 벗어나 1층으로 이사한 날. 더불어민주당 제공
이 당선인은 1964년 경북 안동의 두메산골에서 가난한 부모 아래 7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1976년 2월,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경기도 성남의 빈민촌 상대원 시장 꼭대기 월셋집으로 이사해 아홉 식구가 함께 단칸방 생활을 시작했다. 가정형편 탓에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소년노동자가 됐다. 법적으로 취업이 불가능한 나이 때문에 동네 형 이름을 빌리는 등 6년을 '이름 없는' 소년공으로 살았다.
어린 소년공이 겪어야 했던 노동현장은 녹록지 않았다. 하루 12시간씩 3개월을 꼬박 일했는데 월급을 한 푼도 받지 못한 적도 있었다. 14살에 취업한 냉동회사에서는 함석판을 접고 자르는 일을 하며 상처 투성이었다.
다섯 번째로 취업한 스키 장갑과 야구 글러브를 만드는 공장에서는 평생의 장애로 이어진 큰 사고를 당했다. 가죽 원단을 눌러 모양을 만드는 프레스기에 왼팔 손목 관절이 눌린 것이다. 왼팔의 성장판이 손상됐고, 손목이 뒤틀려 평생 '굽은 왼팔'로 살아야 했다. 왼팔 장애로 인해 군 입대 신체검사에서 6급 판정을 받고 군 복무도 할 수 없었다. 이 같은 유년기의 경험은 '누구도 탈락하지 않는 삶'과 모든 국민의 '기본적 삶이 보장되는 사회'를 꿈꾸는 정치적 소신의 밑거름이 됐다.
l 이 악물고 일과 학업 병행
그가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등 일과 공부를 병행한 것은 공장 관리자가 되기 위해서였다. 소년공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일념으로 검정고시로 중졸·고졸 신분을 취득했다. 그러나 공장 노동자로서의 삶에서 달라지지 않았다. 결국 대학 진학을 결심했다. 소년공의 삶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갈망은 우수한 대입 성적으로 전액 장학금과 생활비 지원 혜택을 받으며 중앙대학교 법학과에 진학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학력고사 수험표. 더불어민주당 제공
1996년에는 제28회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사법연수원에서의 성적은 상위권이었지만 판검사 임용을 앞두고 갈등을 거듭했다. 군부독재 시기 대학에 다닌 그는 소년공으로 살면서 알지 못했던 독재의 진실을 접하게 됐지만 학생운동에 선뜻 나서지는 못했다. 대학생 신분은 그에게는 유일한 생명줄과 같았기 때문이다. 대신 제도권 안에서 사회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 부조리를 개혁하겠다고 다짐했었기에 변호사로서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길을 택했다.

분당 부당용도변경 반대집회 참석 당시. 더불어민주당 제공
1989년 성남에서 변호사 사무소를 개업했다. 당시 성남에는 서울 도시 정비사업에 의해 쫓겨 온 철거민을 비롯해 새로 생긴 공단 일자리를 찾아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곤궁한 처지의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을 외면할 수 없었던 그는 시민운동가 활동을 병행하게 된다.
그는 "기득권자들의 저항을 뚫고 상처와 희생을 감수하고 돌파할 용기, 그것은 과거를 보고 알 수 있다"며 "저처럼 온갖 상흔을 갖고 전투로 삶을 살아온 사람이 그러한 역할에 적합하다"고 강조해 왔다.
l "정치인 돼 세상을 바꾸겠다"
1995년 성남시민모임(현 성남참여자치시민연대) 창립 구성원으로 참여하면서부터 이재명의 삶은 시민운동가로 전환점을 맞게 된다.
2003년에는 성남시 종합병원 두 곳의 동시 폐업으로 의료공백이 발생하자, 시민들이 값싸게 의료혜택을 볼 수 있는 공공의료기관 설립 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주민발의한 시립병원설립조례가 의회에서 단 47초 만에 부결되는 것을 본 뒤 청원하고 감시하는 3자가 아니라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정치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중앙대 법대 입학식. 더불어민주당 제공
정치 입문 초기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처음으로 2006년 성남시장에 출마했지만 낙선했고, 2년 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 통합민주당 소속으로 성남시 분당구에 전략 공천됐으나, 역시 낙선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마침내 2010년 51.2%의 득표율로 민선5기 성남시장에 당선되면서 제도정치권의 일원으로 부상했다.
2013년 11월 성남시장으로서 성남시립의료원 기공식을 갖는다. 또 취임 후 전임 시장의 방만한 경영으로 파탄 상태이던 재정상태를 정상화하기 위해 '모라토리엄(급박한 위기로 지급유예) 선언'을 했고 예산 구조조정을 통해 3년 6개월 만에 부채를 청산했다. 특히 복지예산 비중을 올림에도 불구하고 부채 상환을 성공적으로 해내면서 '복지는 돈 문제가 아닌 철학과 신념의 문제'라는 것을 입증했다.

인권변호사 시절 어느 토론회장에서. 더불어민주당 제공
성남시의 사례는 지방자치단체의 '지방재정위기 사전경보시스템' 도입의 계기가 됐다. '3대(청년배당·교복· 산후조리) 무상복지 정책'을 추진, '누구도 탈락하지 않는 삶'을 현실 정치와 행정으로 실현했다.
이 같은 성과로 성남시장 재선에 성공했다. 정치인 이재명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전국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촛불집회에 적극 참여하고 발언하면서 '사이다'라는 별명을 얻으며 민주 진영의 대선 주자로 급부상했다.
서울=부미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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