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주의 詩읽는 화요일] (51)가변 크기*-김복희

[황학주의 詩읽는 화요일] (51)가변 크기*-김복희
  • 입력 : 2024. 01.23(화) 00:00
  • 오소범 기자 sobom@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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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미술관이 작품 하나의 규모를 감당할 수 있을까

말할 것도 없지



상자에서 소리를 꺼낼 수 있을까

더 큰 상자에 소리를 옮겨 담을 수 있을까

말은 하면 안 되지 섞이니까



더 큰 시를 이 책이 실을 수 있을까

더 작은 시는?



시 읽는 사람을 공원 벤치가 쉬게 할 수 있을까

단 1분이라도



이제는 시를 읽지 못하는 사람에게

당신의 이름은 시예요

잊지 않았지요 말하듯이

이름에 그 사람을 담을 수 있을까

또 낭독하듯이 *「가변 크기」 부분

삽화=써머



가변 속에서 주제를 찾는 시 이야기라기보다 가변을 벗어난 데서 시를 찾는 이야기라고 해야 하겠다. 담담하지만 확고하게. '그럴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뒤집으며 경계를 넘어가는 말법으로. "당신의 이름은 시예요". 그렇다. 하나의 미술관이 작품 하나를 다 감당할 수 없다는 구절은 가치 비교에 관한 말이 아니다. 삶은 온통 시가 떠받치고 있지 않는가. 본질적으로.

"더 큰 시"가 있다면 "더 작은 시"는 없으며, 더 작은 시가 있다면 더 큰 시도 없다. 둘은 각자 고유하지만, 시를 모르는 사람 손에 들어가면 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시를 읽는 사람은 계속 시를 읽을 것이고, 짓는 사람은 계속 시를 지을 것이다. 심지어 "이제는 시를 읽지 못하는 사람"의 이름이 시이기까지 하다. 그가 기쁘게 다시 읽을 수 있다면, 그냥 한 알의 작은 시가 우주를 굴러가는 거지만, 과연 시에 그 사람을 담을 수 있을까? 시를 버리고 스스로에게 시의 질료(이름)까지를 부여하는 일은 내키지 않을 수도 있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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