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주의 詩읽는 화요일] (65)잘 익은 사과-김혜순

[황학주의 詩읽는 화요일] (65)잘 익은 사과-김혜순
  • 입력 : 2024. 04.30(화) 00:00
  • 오소범 기자 sobom@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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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익은 사과-김혜순




[한라일보]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 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 등을 덮어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사람의 마음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을 만날 때마다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믈오믈 잘도 잡수시네요

삽화=배수연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울고, 자전거 바퀴가 치르치르 도는 소리가 청각 이미지로 치환된 세월이라면 참 좋을 것이다. 세월이 그렇게 환상적이고 부드러울 수 있다면. 그 가운데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주는 한 송이 차가운 구름은 머물고, 그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가인 사람의 마음 냄새. 그 사람에 대한 안타깝고 아린 감각을 불러내기 위해 눈물의 '처녀 엄마'와 '입양 가는 아가'가 등장한 것일까. 과도함마저 뛰어넘는 김혜순의 시적 환상에 의해. 후반부에 '노망든 할머니'가 그 모습을 드러내 아가를 입양 보낸 사람이 그 할머니와 같은 사람일 수 있다는 흔한 추측을 낳지만 그 할머니는 그 할머니가 아닐 수도 있어서 다행이다. 노망들 정도로 살았다면 인생을 잘 익은 사과 맛으로 음미한다 해서 잘못이랄 수도 없고. 거기까지 길은 모든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야 하고, 내가 탄 자전거 바퀴는 사과껍질처럼 연속된 모서리를 깎으며 돈다. 시각적으로 나의 절벽을 보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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