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선희의 백록담] 환상 속의 '차 없는 거리'

[진선희의 백록담] 환상 속의 '차 없는 거리'
  • 입력 : 2023. 07.03(월) 00:00  수정 : 2023. 07. 04(화) 09:2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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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특별시장 등은 생태·문화 탐방 등 해당 지역의 지리적·문화적 체험기회를 제공하거나 안전하고 쾌적한 보행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하면 보행자전용길을 조성할 수 있다." 제주시 도심에는 이 같은 보행안전법에 의해 지정한 보행자전용길이 두 군데 있다. 길이 350m에 이르는 관덕로11길 일대 칠성로 상점가 차 없는 거리와 450m의 연동7길 누웨마루 차 없는 거리다. 전일제 방식의 보행자전용길로 운영 중인 두 거리는 2011년(누웨마루)과 2016년(칠성로)에 잇따라 탄생했다. 이 과정에 도로 포장, 야간 경관 조명, 벤치 등을 갖추면서 각각 수십억 원의 예산이 투입됐다.

얼마 전 제주시가 추가경정예산안에 차 없는 거리 행사 사업비 1억6000만 원을 편성한 적이 있다. 2019년 대한민국 문화의 달 제주 행사 때처럼 가을날 하루를 정해 관덕정 일대 500m 남짓한 도로 구간의 차량 통행을 금지시켜 거기에 보행자들이 즐길 공연과 체험 프로그램을 마련할 목적에서다.

결과적으로 제주도의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예산이 전액 삭감되면서 올해 사업은 물거품이 됐다. 앞서 이 행사를 기획한다는 소식에 '차 없는 거리 추진'이라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는데 한편으로 이는 도심 차 없는 거리 추가 지정에 대한 일각의 관심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제주시 두 지역의 차 없는 거리 조성으로 가로 활성화가 이뤄지고 보행자 수가 늘면서 매출액 증가로 연결됐다는 최근의 연구 논문이 있긴 하나 구체적 수치까진 제시하지 못했다. 두 거리가 상업시설이 밀집한 곳에 있어서 지역 특성을 품은 보행자의 이동·휴식 공간이 뒷전으로 밀려난 측면도 있다. 이는 차 없는 거리에 대한 체감도가 낮은 원인 중 하나로 여겨진다.

거리 활성화를 위한 움직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제주시는 주 1회 차 없는 거리에서 공연을 벌일 지역 예술인들을 공모해 무대에 올려 왔다. 지난해엔 45팀이 참여했고 올해는 51팀이 공연을 펼친다. 인프라 확충만이 아니라 그 공간에 색깔을 담기 위해 매년 적지 않은 비용을 들여 거리예술제를 치러오고 있는 것이다.

기왕 제주시에서 4년 전 관덕정 차 없는 거리 행사의 성과를 이어가겠다는 계획을 꺼낸 만큼 앞으로는 그것이 보행 안전 도시의 비전 아래 실현되길 기대해 본다. 제주시청 앞에서 시범 운영 예정인 '도로 다이어트' 사업만 하더라도 주차 면수를 줄여 나무를 심고 보행자들을 위한 쉼터 등을 늘리겠다는 구상이라면 과감한 정책 추진이 필요하다. 관덕정과 인근 제주목 관아의 고풍스러움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제주시청 본관 건물은 한국전쟁 중에 건립된 '구 제주도청사'란 명칭의 국가등록문화재라는 점에서 그 주변 보행길 확장은 시민들에게 또 다른 역사 경관 체험 기회를 줄 수 있다.

'차 없는 도시는 자동차를 무조건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와 보행자의 균형을 되찾는 것'(서울연구원의 '보행도시')이라고 했다. 왕복 4차로를 막는 화려한 이벤트로 접근해 차 없는 거리를 '환상 속의 그대'로 만들기보다는 우리 곁의 보행길을 넓히는 데서 새로운 걸음을 시작해 보자.<진선희 행정사회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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