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영의 제주마을 탐방] (5)작지만 사이좋은 이웃, 한수리

[조미영의 제주마을 탐방] (5)작지만 사이좋은 이웃, 한수리
작은 골목에 빽빽히 모여 살아… 주민들간 우애 깊어
  • 입력 : 2018. 05.29(화) 00:00
  • 조상윤 기자 sycho@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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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리 전경.

해상 화산폭발로 해일일며 사라진 마을
음력 2월 영등굿 준비 동네사람들 협심
한림항서 바라보는 석양 장관 '선유한수'







한림과 수원리 사이에 위치해서 붙여진 이름 한수리. 1685년 대림리에서 분리돼 잠수리(潛水理)라고 했다가 1882년 수원리로 개칭되며 수원리 1구, 2구로 불렸다. 1953년 수원리에서 분리돼 지금의 한수리가 됐다. 하지만 한수리의 역사는 서기 1002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수리 지경의 해안선으로 6개의 봉천수가 솟아나는 덕분에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살았다. 그러나 해상의 화산폭발로 비양도가 분출하며 해일이 일어 마을을 삼키고 만다. 마을도 마을사람도 모래에 덮쳐 사라져 버렸다. 이후 마을은 모래동산이 돼 순부기 나무로 덮여버린다.

시간이 흘러 이 모래동산에 하나, 둘 집이 지어지고 살았다. '조물캐'라는 이름만이 어렴풋이 기억을 되새겨줄 뿐이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에 한림항을 건설하기 위해 이 곳을 매립하던 중 모래에 파묻혔던 과거가 드러난다. 예전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과 유물이 발견된 것이다. 아쉽게도 제대로 된 발굴절차는 없었다. 유물들은 일본인들에 의해 도굴되다시피 했고, 동네사람들은 그릇 등의 유물을 봐도 재수가 없다고 깨버리곤 했다. 어쩌면 땅 속 어느 곳에는 아직도 고려시대 유물이 잠겨있을 지도 모른다.

마을 골목길.

한수리는 아주 작은 마을이다. 그러나 인구밀도가 높다. 거주지는 한수리이지만 밭은 수원리나 대림리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다. 행정동으로 분리될 당시 인구밀도로 나뉘다보니 사람이 많이 거주하는 한수리만 분리돼버린 셈이다. 그래서인지 시골마을답지 않게 오목조목 마을이 꽉 찬 느낌을 준다. 작은 골목을 빙빙 돌며 집들이 빽빽하다. 옆집의 밥숟가락조차 다 아는 지경이 이런 경우를 말하는구나 싶다. 그래서인지 서로간의 우애가 좋다. 해녀들이 비양도로 물질을 나갈 때면 마을리장님이 출동한다. 그분들의 수확한 해산물을 받아주고 운반하는 일을 해주기 위해서다. 반대로 마을회의 일이 있을 때면 어촌계에서 적극 나서서 일을 돕는다. 마을회(장석범 이장)와 어촌계(홍경자 계장)가 마치 오누이 같이 공동으로 협력한다.

마을 용천수.

이런 풍토는 마을 행사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매년 음력 2월 영등굿이 다가오면 마을은 축제 준비로 여념이 없다. 동네사람들이 협심해 준비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축제에 빠질 수 없는 음식마련도 척척 호흡을 맞춘다. 마을회에서는 돼지를 준비하고 어촌계에서는 해산물을 마련해 마을사람들은 물론 외지에서 찾아온 방문객들에게도 푸짐히 대접 한다. 예전에는 일주일간 영등굿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중단됐다가 최근 다시 복원돼 마을축제처럼 이어가고 있다.

하루방당.

이를 이어가는 배경에는 한수리에 위치한 하루방당과 할망당 덕분이다. 바다의 풍어를 관장하는 하루방당은 대섬 앞 방파제 쪽에 위치한다. 하루방당의 전설을 기초로 재현해 놓은 것이다. 마을 앞 한수리 938번지에는 할망당이 있다. 갯바위에 팽나무들이 작은 군락을 이뤄 나무가 있는 당이라는 뜻의 '남당'이라고도 불린다. 이곳에서는 마을의 안녕과 밭농사와 바다농사의 풍년을 기원한다. 지금은 당으로 들어가는 길에 나무데크가 깔려있어 접근이 쉽다.

할망당.

한림항은 한림리와 한수리에 걸쳐져 있다. 특히 한림항 동쪽 끝 방파제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장관이다. 그래서 예부터 '선유한수'라는 말을 했다. 한수리에서 바라본 뱃놀이의 풍경이 멋지다고 붙여진 말이다. 그리고 대섬과 톤대섬 사이에서는 갈매기 떼를 볼 수 있다. 해안도로에 세워진 솟대위의 갈매기는 이를 형상화한 것이다. 방파제 맞은편으로 지붕을 씌운 물통이 보인다. 용천수를 활용한 노천 목욕탕이다. 남탕, 여탕으로 분리돼있어 지금도 여름이면 시원한 냉수욕을 즐기는 이들이 많다.

작은 마을이지만 없는 것 없이 오목조목 다 갖춰있는 한수리이고 보니 사람들이 빼곡히 모여 사는 충분한 이유가 될 만하다. 최근에는 젊은이들이 빠져나간 자리에 외국인 선원들이 들어와 메우고 있다. 앞으로 이들과 마을 내 공존을 위한 소통의 길을 잘 터가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그동안 여러 역경을 지혜롭게 잘 헤쳐 나갔듯이 긍정적으로 발전할 것이라 믿는다.

<여행작가>











[인터뷰] 장석범 한수리장·함동윤 개발위원장


"마을화합위해 서로 돕고 있다"


▶장석범 이장

우리 마을은 보릿고개가 없던 마을이다. 어렸을 때도 반지기 밥을 먹고 자랐다. 반농반어로 어머니들이 해녀를 하고 밭일을 하면 아버지들은 어선으로 수익을 올린 덕분이다. 앞선 이장님들의 성과를 이어받아 사업을 진행 중이다. 영등굿 축제를 마을축제로 승화시켜나가고 체험어장을 조성해 마을 수익사업으로 이어가고 있다. 테우 낚시 체험과 고망낚시 체험 등을 6월에서 9월까지 운영하는데 이를 어촌계와 협력해 좀 더 내실 있게 추진할 생각이다.

동네의 해녀가 22명이다. 이 분들이 비양도로 물질을 나갈 때면 개발위원장님과 내가 번갈아가며 뒷바라지를 한다. 이렇게 서로 돕는 것이 마을의 화합을 위한 길이다. 그래서인지 우리 마을은 마을회와 어촌계가 사이가 좋다.

일제강점기에 어뢰정을 숨겨놓았던 곳이 바닷가에 있다. 비록 어두운 역사지만 복원해 교육자원으로 이용해야 한다고 본다. 또한 우리 마을 리사무소가 한림읍에서 가장 오래됐다. 새로 지어 쾌적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하겠다.



"영등굿 복원해 축제처럼 진행"


▶함동윤 개발위원장

우리 마을에는 농토가 없다보니 마을 직불제 보상 등을 받을 수 없어 마을 재산이 없었다. 마을회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종자돈이 필요한데 막막했다. 그래서 마을 사업을 추진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행정의 도움으로 어촌지원센터를 지어서 임대 수익 등을 통해 자본을 만들었다. 이 수익금은 다시 노인회, 청년회, 부녀회, 어촌계 등과 나눠 마을 사업이 활성화 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노인회 지원에 힘썼다. 우리 마을의 정신인 경로효친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다. 그 외에도 영등굿을 복원했다. 어릴 적에 굿판에서 떡도 먹고 동전도 줍던 기억이 있는데 중단됐다. 4년 전부터 복원해 축제처럼 진행한다.

용천수 복원사업도 했다. 바다를 매립하고 대섬을 방파제로 이으며 용천수 일부가 매립돼버렸다. 하지만 3개는 보존해 지금은 노천욕 체험시설로 활용하고 있다. 방파제를 무조건 크게 지은다고 좋은게 아니다. 미래세대까지 자원을 남겨두기 위해서는 바다 자체의 정화기능을 되살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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