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100년' 제주 원풍경을 되살린다](4)삼성혈·사직단·광양당

['경술국치 100년' 제주 원풍경을 되살린다](4)삼성혈·사직단·광양당
광양벌은 개벽설화 '풍요기원'흐르는 곳
  • 입력 : 2009. 02.16(월) 00:00
  • 강문규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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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강부언 화가(한국화)

정조임금 '三姓祠'어필 편액 등 보내
풍운뇌우단·사직단에서 수령이 치제

광양왕, 제주의 穴 자른 호종단 단죄


불과 50여년 전만 해도 제주시 남문로터리를 따라 광양으로 이어지는 곳에는 드넓은 벌판이 펼쳐져 있었다. 해방 전후 시기에 찍힌 항공사진을 보면 광양벌에는 울창한 고목들이 둥그런 형태로 삼성혈을 둘러싸고 있다. 마치 오아시스와 같은 모습이다. 사실 이 지역은 오아시스가 목마른 이들에게 생명수를 공급하듯 제주도민들이 간절한 소원을 빌었던 기도처였다. 그러면서 한편에서는 선인들이 늘상 무예를 연마하며 유사시에 대비하던 곳이기도 하다. 제주의 개벽설화가 깃들어 있고, 삶의 풍요를 기원하며 상무의 정신을 키웠던 터전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주택과 빌딩이 빽빽히 들어서고, 쉴새 없이 자동차 행렬이 꼬리를 물며 지나가는 거리에서 선인들이 남긴 자취를 떠올리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탐라개국의 신화가 담겨 있는 사적 134호인 삼성혈에는 삼성 시조(始祖)의 전패를 모신 삼성전과 이들을 제사하는 삼성사, 숭보당이 있다. 삼성에 대한 제사는 조선 중종 21년(1526) 목사 이수동이 제단을 세워 춘추제를 지내게 하면서 부터다. 춘제는 4월 10일 고·양·부 3성씨가 윤번제로 하고, 12월 10일 건시제는 제주도민제로 거행하고 있다. 삼성사(서원)는 영조 16년(1740) 안경운목사가 세운 뒤 정조 9년(1785) '삼성사'라는 어필 액자 등이 내려졌다. 경내에는 수백년 묵은 고목들이 울창한데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이곳의 고목을 베어 군사용 목재로 쓰고, 고사포진지를 구축하려다 반발에 부딪혀 무산됐다는 이야기도 내려오고 있다.

▲광양벌은 도내에서는 드물게 평평한 지형으로, 이곳에는 탐라개벽 설화가 깃들어 있는 삼성혈을 비롯하여 사직단, 연무정이 시대에 따라 설치·폐지됐다. 삼성혈 경내 울창한 숲이 '도심속 허파'처럼 보인다. /사진=이승철기자

삼성혈 외에도 주변에는 국태민안을 기원하기 위한 여러 유적이 있었다. 남문 밖 3리(교보빌딩 남쪽)에는 사직단이 있었다. 종묘(宗廟)와 함께 나라의 신과 곡식의 풍요를 관장하는 신에게 제를 지내던 곳이다. 매년 봄·가을·겨울에 고을 수령이 직접 제를 올렸다. 이러한 정기적인 제 외에도 큰 변란이 있을 때 올리는 기고제(祈告祭)와 보사제(報祀祭), 가뭄이 들었을 때 드리는 기우제, 풍년을 기원하는 기곡제(祈穀祭) 등이 거행됐다. 사직은 토지의 신인 사(社), 곡식의 신 직(稷)을 뜻한다.

사직단 곁에는 '풍운뇌우단'이 있었다. 풍신(風神), 우신(雨神), 뇌신(雷神), 우신(雨神)에게 제를 지내던 제단이다. 풍운뇌우단은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에서 봉제해 왔다. 그런데 조정에서만 제를 올릴 뿐 지방에서는 치제(致祭)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제주에서는 이 제를 올려 왔다. 이는 이형상목사가 조정에 보고했듯이 탐라국시대부터 풍운뇌우단을 설치, 제를 지내 온 전통을 계승한 것이었다. 이 곳에서는 음력 2월과 8월 두차레 제사를 봉행했다. 1735년(영조 11년) 제주목사로 부임한 뒤 2년 6개월여 임기를 마친 노봉 김정목사의 '풍운뇌우단 기우문'을 보면 비가 내리지 않은 지 34일이 지나니 모든 생물이 타서 말라 들어가 목숨을 유지하기에 급급하니 곧장 단비를 내려주길 기원하는 글이 보인다. 풍운뇌우단은 1702년 이형상목사에 의해 헐렸다가 1719년 목사 정석빈이 주민의 소청을 들어 다시 설치된다.

▲이형상 목사가 1702년 남긴 탐라순력도 '제주조점'에는 제주성 남쪽 광양벌에 사직단이 그려져 있다.

제주는 예부터 풍재(風災)·수재(水災)·한재(旱災)가 많아 삼다라고 했다. 그 만큼 토질이 척박하고 풍수해가 물굽이처럼 거듭 몰아닥치며 도민들을 괴롭혔다. 삶이 곤궁하게 되면 하늘에 의지하려는 것은 동서고금의 인간사다. 풍운뇌우를 관장하는 하늘에 제를 올리며 풍요로움을 기원해 온 것도 같은 행위다. 이형상 목사가 헐어버린 풍운뇌우단이 그 후 도민들의 소청에 의해 다시 부활한다. 연이어 재해가 발생하면서 백성들은 그 원인을 풍운뇌우단 등을 부숴버려 하늘의 노한 것에서 찾았을 지도 모른다. 이러한 성난 민심을 조정이 거스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사직단은 그 후 정석빈목사가 '묵은성' 서쪽의 속칭 '사작이' 안으로 옮겼으나 1908년(융희 2) 7월 폐지되었다.

오현단을 따라 삼성혈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신화의 섬에서도 그 의미가 독특한 광양당터가 나타난다. 옛 적십자회관 주변에 세워진 '광양당터'라는 표석에는 짧게 광양당이 어떤 당인 지를 소개하고 있다. 이원진의 '탐라지'를 보면 주성 남쪽 3리에 한라호국신사인 광양당이 있다고 했다. 내용을 보면 한라산신의 아우가 죽어 신이 되었는데 고려 때 호종조(일설에는 호종단)이 제주에서 혈을 자른 뒤 배를 타고 돌아가려고 했다. 그 때 한라산신의 아우가 매로 변해 돛대위를 나니 별안간 폭풍이 불어 배를 쳐부수고 비양도 바위사이로 몰아넣어 죽게 했다는 것이다. 조정에서는 그 영특함을 표창하여 식읍(食邑)을 하사하고, 광양왕으로 봉하여 해마다 관에서 제를 지내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광양당은 숙종 28년 (1702) 이형상목사의 '당오백 절오백'을 없애며 함께 헐어버렸다고 한다.

광양은 시야가 탁트이고 제주에서는 보기 드물게 평편한 벌판이었다. 그래서 1636년 (인조 14) 신경호 목사는 "제주에는 온 섬에 악석(惡石)이 널려 있으나 오 직 이곳은 풀 하나 없고, 평평하기가 손바닥 같아서 하늘이 준 (무예)연습장"이라며 이곳에 연무정을 세웠다. 신목사는 병사들을 동원, 재목을 모으고 기와를 구워 정청과 동서협 각 2 두칸의 건물을 짓고 주위에 담장을 둘러 한달여 만에 공사를 마쳤다. 1694년 (숙종 20) 이익태목사가 중수했으나 1741년(영조 17년) 7월 태풍으로 다시 허물어지자 1741년9영조 22년) 목사 한억증이 지금의 동초등학교로 이설했다.

넓은 벌판에서 무예를 닦던 전통은 그 후 일제강점기에는 각종 경기를 위한 운동장으로 쓰여졌고, 1970년대 초 오라동에 경기장이 들어설 때까지 도민체전을 비롯한 각종 경기가 지금의 제주시청 북쪽 벌판에서 열렸다. 그런데 지금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게 변해 버렸다. 눈에서 사라지면 마음에서도 사라진다고 했던가. 선인들이 남긴 유적을 하나씩 복원해 역사문화자원으로 활용하는 지혜를 발휘해 나갈 때다.

[훼손될 뻔 했던 삼성혈]

해방 직전 일본군은 패색이 짙어지자 '결 7호작전'에 의해 제주도전역에 진지를 구축하기에 나선다. 그 무렵 고양부 삼성사대표인 건입동 출신 고인도(작고)를 일본군사령부(전 제주농고에 위치)가 호출했다. 총검을 든 초병들이 서 있는 문을 지나 사령관실로 들어가니 사령관이 다짜고짜 '삼성혈에 있는 곰솔나무를 베어내고 고사포진지를 구축하려 하니 협조하라'고 요구해 왔다. 그 말을 듣자 오금이 얼어붙는 듯 했다. 그러나 그는 잠시 생각한 뒤 "조상이 태어난 삼성혈을 훼손하고 내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협조해 내가 삼성 후예들에게 맞아 죽거나, 여기서 요구를 거절해 죽거나 매 한가지니 나는 그 요구를 들어 줄 수 없소"라고 말했다. 그러자 사령관은 불같이 화를 내며 욕을 한 뒤 당번에게 '데리고 나갓'하고 지시했다. 고씨는 그게 처형시키라는 명으로 들렸다. 그러나 그것으로 무사히 끝났다. 아무리 전시라고 해도 삼성혈이 어떤 곳인 지를 알고 있는 사령부로서는 그것을 훼손할 경우 도민적 반발과 저항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을까. 그후 고씨는 미군이 제주에 진주할 때 가장 앞서 태극기를 들고 미군입성을 환영했다고 한다. -(김석종의 '포구의 악동들'과 고인도의 막내인 고달익(전 제주교역대표)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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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1 개)
이         름 이   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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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평 2009.02.16 (22:29:46)삭제
그림에 함량부족이다. 너무 밋밋하다. 최소한 고산동산과 동문내와 병문내가 그림 가운데 나타나고 멀리 산양오름의 실루엣이라도 포함되어야 했다. 옛 픙경을 돠살리려면 그만큼 숙고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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