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제주마을 탐방] (10)서귀포시 대정읍 무릉1리

[2021 제주마을 탐방] (10)서귀포시 대정읍 무릉1리
이름 그대로 풍요로운 마을 무릉도원에 들다
  • 입력 : 2021. 11.22(월) 00:00
  • 이정오 기자 qwer6281@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옛 이름 도원리의 ‘도원’ 오늘 무릉리의 ‘무릉’ 합쳐
풍요로운 이상향을 마을 이름으로 가져온 ‘무릉도원’

내력 깊은 마을이지만 문화정체성 민생현안 뒤처져

제주사람들 사이에는 속담처럼 전해오는 이런 말이 있다. '제일 강정 제이 번내 제삼 도원'이 경구처럼 전해오는 민중의 레토릭이다. 이 문장에 등장하는 세 마을은 제주에서 쌀농사를 가장 많이 짓는 곳을 가리킨다. 강정이야 오늘날 강정마을로 불리는 곳이고 번내는 안덕면 화순리를 이른다. 마지막 도원은 신도리와 무릉리를 하나로 뭉뚱그린 지명으로 근대식 행정편제가 시행되기 전에 두 마을이 도원리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한 마을이었을 당시의 명칭이다. 옛 이름 도원리의 '도원', 오늘날 무릉리의 '무릉'을 합치면 누구나 잘 아는 무릉도원이다. 풍요로운 이상향을 마을 이름으로 가져왔으니 무릉1리를 도원경이라고 여겨도 눈을 흘길 사람은 없을 만하다. 벼농사가 힘든 섬에서 소위 '곤 밥'을 배불리 먹던 마을이니 당연하지 않는가.

무릉향사

앞서 말한 대로 무릉1리는 애초에 신도리와 한 마을이었던 바 설촌 유래도 같다. 마을에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임자(壬子) 조막(造幕)하고 갑인(甲寅) 설동(設洞)'했다는 말이 있다. 이를 근거로 추정하면 1554년일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이후 세월이 흐르는 사이 마을이 분리되며 '구목리(枸木里)'라는 이름을 새로 얻었고, 다시 개칭한 것이 오늘날의 무릉리가 됐다고 한다. 무릉1리와 2리가 분동된 것은 1920년대 근대식 행정편제가 이루어질 당시이다.

내력이 깊은 만큼 무릉1리에는 유서 깊은 마을명소와 그에 따른 사연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제주의 마을이라면 어디에나 있는 설촌 수호신을 모신 본향당이 무릉1리의 역사지 중 으뜸이겠다. 무릉1리 본향당은 '물동산 일뤳당'으로 불린다. 이 당에는 대정읍 하모리의 '문수물당'에서 가지 갈라온 '문수물한집할망'을 모신다. 신당의 명칭 속에 '일뤠'가 들어있어서 음력으로 매달 7, 17, 27일에 찾아가 기원을 올린 곳이다. 과거와 달리 이 당을 찾는 발길이 뜸해졌지만 여전히 몇몇 주민들은 정성스레 찾아가 지극한 기도를 올린다고 한다. 마을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기원을 올릴 때에는 메 2기, 물색(삼색 천), 지전, 명실(실타래), 삼색과일, 제주(祭酒) 등을 진설한다고 한다. 본향당 어귀에 세워진 비문에 따르면 1835년에 마을에 돌림병이 창궐해서 수많은 청년들이 목숨을 잃는 사태가 발생하자 마을포제를 시작했고, 2년 뒤에는 하모리의 문수물당을 가지 갈라왔다는 사연을 지니고 있다.

무릉1리 방사탑

모동장의 옛터

본향당 가까운 곳에는 마을 안쪽을 향해 남과 북으로 줄지어 늘어선 방사탑 무리가 단단한 위세로 우뚝 서 있다. 무릉리 중동에 위치한 4기의 방사탑은 오랜 세월을 버텨온 탓에 무너져 내리는 등 많은 훼손을 입었으나 2000년을 전후한 시기에 다시 복원해서 옛 모습을 되찾았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4기의 방사탑을 하나로 잇는 돌담을 되살리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일종의 방사벽이었던 셈인데 주변에 비닐하우스를 비롯한 현대식 영농시설이 들어서며 제 모습을 영영 잃어버린 상황이다. 이 방사탑들은 여느 마을의 비보풍수처럼 사람과 가축의 돌림병을 막고 마을에 미치는 액운을 소멸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것이다. 원통 모양을 한 탑신의 꼭대기에는 마치 돌하르방을 닮은 자연석을 세워놓았다. 마을노인들에 따르면 탑 속에 무쇠솥을 묻었다고 한다. 무쇠는 무엇보다 단단한 쇠의 기운으로 액을 제압하려는 유감주술적인 의도를 지니고 있다. 거기에다 무쇠솥이니 솥에 불을 지펴 액운을 태워 없애겠다는 염원까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마을 안길로 들어서면 무릉1리사무소 옆 골목 안에 고색창연한 옛 집이 솟을대문까지 갖추고 길손의 이목을 잡아끄는데 이곳이 바로 무릉향사이다. 무릉향사는 말 그대로 봉건시대의 마을회관이며 마을사람들이 대소사를 공론하는 것은 물론 학문을 수양하던 선비들이 모여들던 곳이다. 전형적인 조선시대 기와집의 풍모를 지닌 이 향사는 본래 안성리에 자리했던 대정현의 객사를 해체해 이 자리로 이설해 온 것이라고 한다. 무릉1리 향사 복원비문에 따르면 1989년부터 이듬해까지 2년에 이설해 완공했다고 한다. 향사 부지 안에는 두 채의 건물과 고풍에 어울리는 나무들이 웃자라고 있어서 운치를 더욱 깊게 만든다.

무릉1리 본향당 물동산일뤳당

무릉1리에는 마을의 설촌과 궤를 같이할 정도로 내력이 깊은 곳이 있는데 모동장(毛洞場)이 그곳이다. 무릉리, 신도리, 영락리 등을 아우르는 너른 평원에 자리했던 모동장은 조선시대 국영목마장 중 한 곳인데, 이 마을에 포함된 곳은 무릉리 2666-3 번지 일대이다. 이원조(李源祚)의 탐라지초본(耽羅誌草本)을 비롯한 고문헌에 따르면 목장 둘레가 무려 37리나 되는 대단한 규모를 지녔었다고 한다. 자료에 따라 모동우장(毛洞牛場), 모동삼장(毛洞三場) 등으로도 불리는데 신도리 부분의 서장(西場), 무릉리 부분의 중장(中場), 영락리 부분의 남장(南場)으로 이루어졌던 곳이다. 이곳은 제주의 10소장 중 대정현 관할의 7, 8소장에서 골라온 진상용 체임마(遞任馬), 연례마(年例馬), 어승마(御乘馬) 등을 일시적으로 머무는 곳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애초에는 말을 사육하는 마장(馬場)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며 소를 기르는 우목장으로 변화한 뒤 20세기 초에 폐장돼 오늘날은 농경지로 남아있다.

황금진 노인회장

마을회관에서 만난 황금진 노인회장과 고지영 사무장은 기대 반 근심 반으로 이런저런 마을이야기를 펼쳐놓았다. 고지영 사무장에 따르면 마을인구가 730여 명에 이르는데 그 중 이주민 비율이 대략 20% 정도라고 한다. 비율상 많지는 않으나 이주민이 점점 늘어가는 상황인데 토박이들과의 내왕이며 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것이 걱정이다. 또한 마을주민들도 점차 고령화되는 추세라 근심이 깊다. 그렇다고 주저앉아 근심에만 빠질 수는 없는 법, 마을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을 가해 지난해에는 제주도에 주관하는 자율개발사업에 선정돼 마을기업을 구상 중이며 마을의 자연과 인문자원을 지키기 위한 경관보전사업을 야심차게 진행하고 있다.



고지영 사무장

황금진 노인회장은 과거와 견주어 현재를 진단하며 각종 민생현안을 토로했다. "대정읍 관내 서 6개리 중에 신도2리와 무릉2리에만 보건소가 있어서 마을노인들이 병원에 나다니기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파출소 출장소도 없어서 치안 문제도 개선되어야 한다. 이대로 가면 점점 낙후한 시골마을로 전락할 지도 모르겠다. 젊은 사람들이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으니 뜻한 대로 될 거라고 기대한다."

오늘날 제주는 내력이 깊은 마을일수록 문화정체성과 각종 민생현안에서 뒤처지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되는데 무릉1리의 사정도 비슷하다. 물론 이 마을은 무릉도원으로 소문났던 곳인 만큼 비 온 뒤에 땅이 더욱 단단해지듯이 금세 위용을 되찾을 것이라는 믿음을 안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무릉도원, 그 도원경은 붉은 노을에 물들어 금빛 들녘으로 찬란한 빛을 뿜어내고 있다.

글·사진=한진오(극작가)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