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환의 한라시론] 남북한의 유엔동시가입 30주년을 뒤돌아보며

[김장환의 한라시론] 남북한의 유엔동시가입 30주년을 뒤돌아보며
  • 입력 : 2021. 04.15(목) 00:00
  • 이정오 기자 qwer6281@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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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해방 후 6.25동란을 격고난후 많은 국민이 산업화에 동참하면서 땀 흘려 일한 덕분에 이룩한 경제발전에 이어, 86·88 아시안게임과 올림픽개최로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게 됐다. 그리고 북방정책이 추진되면서 동서냉전으로 인해 반쪽으로 갈라졌던 사회주의진영 국가들과 관계개선으로 유엔가입을 위한 발판도 마련했다.

91년 9월 우리나라의 유엔가입은 그간 남북이 각기 유엔 가입을 시도하다 좌절된 후, 우리 정부가 남북동시가입으로 방향을 선회함에 따라 실마리를 찾게 됐다. 남북고위급대화를 통해서도 제기됐지만, 북한은 분단고착화가 될 수 있다며 단일국가로 가입해야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올해는 우여곡절 끝에 남북의 유엔 동시가입이 실현 된지 3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의 유엔가입이 이뤄진 배경과 역사를 살펴보면 여러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물론 우리나라의 집요한 외교적 노력이 중국의 개혁개방, 소련의 개혁 등 국제환경변화와 맞물리기도 했다. 70년대 미·중간의 관계개선에 이어 중국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은 국제정세의 변화뿐만 아니라, 80년대 초부터 한·중국간 민간형태의 간접교류가 이뤄지는 등 크고 작은 변화를 가져왔다. 한·중양국간 무역증가는 관계개선을 마련하는 단초가 됐고, 양국간 일어난 83년 5월 중국민항기사건을 포함한 각종 돌발 사건들은 한·중관계 개선의 필요성을 양국지도층에 각인시키게 됐다.

또한 한국의 유엔단독가입을 선도적으로 반대해 왔던 소련과 수교가 90년9월에 이뤄지고, 91년 4월 제주에서 거행된 한·소 정상회담에서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이 한국의 유엔가입을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함에 따라, 남·북한의 유엔동시가입은 국제적 관심사로 부상했었다.

한·중 양국은 천안문사태로 잠시 지체되기도 했으나, 오랜 동안의 인적·물적 교류와 물밑대화를 통해, 91년 초 북경과 서울에 상호 무역사무소를 설치했다. 이어서 한·중 양국은 수교에 앞서 해결해야 할 새로운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한국정부의 남북유엔동시가입 또는 단독가입에 대해 중국은 홀로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중국은 한국의 유엔 단독 가입은 곤란해 했지만,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에는 동의하면서도 남북한이 직접 대화를 통해 타협하기를 희망했다. 중국은 개혁개방을 위한 국제사회와 교류확대, 그리고 한국과 관계개선을 위해 북한 측의 입장변화가 필요했다. 91년 5월 이붕 총리는 북한을 방문, "한국의 유엔가입에 반대하기 어렵고, 한국이 단독으로 가입 후 북한이 가입하려면 아마도 곤란에 처할 수 있을 것 같다"며 남북의 유엔 동시가입에 대해 북한 연형묵 총리와 협의를 시작했고, 김일성주석이 이붕 총리에게 "조선은 중국과 이 문제에서 협조키로 했다"고 입장전환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당시 북한이 우려했던 것은 미국이 남북유엔동시가입과 북핵문제를 연계시켜 북한의 유엔가입을 반대하고, 한국만 가입되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물론 미국과 우방국들의 적극적인 지지가 있었고, 특히 미국이 남북유엔동시가입과 북핵문제를 분리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만약 그 당시 북한이 핵개발을 포기하고, 중국·베트남과 같이 개혁개방을 선택했더라면, 지금쯤은 눈부신 경제발전을 바탕으로 남북이 유엔가입 30년 주년을 함께 경축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안타까운 상상을 해 본다. <김장환 전 광저우총 영사.한국외교협회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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