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직·간접 개입 규명돼야 제주4·3 퍼즐 완성

미국의 직·간접 개입 규명돼야 제주4·3 퍼즐 완성
허호준의 '4·3, 미국에 묻다' 4·3과 미국의 관계 집중 조명
1948년 5월 제주도 회의 관련 무차별 사살 명령 기사 등 발굴
"4·3 전개 과정 처음부터 끝까지 알고 있던 미 책임 가볍지 않아"
  • 입력 : 2021. 04.06(화) 16:37
  • 진선희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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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과연 4·3에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가. 30여 년 제주4·3과 미국의 관계 규명에 천착해 오는 동안 그의 머릿속엔 이 같은 물음이 떠나질 않았다. 그는 4·3 당시 숱한 학살과 재산 피해, 살아남은 이들의 트라우마에 대한 1차적 책임은 당시 정부에 있다고 본다. 그러나 미국은 4·3의 전개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알고 있었고, 때로는 공개적이고도 직접적으로, 때론 은밀하고도 간접적으로 개입했다. 미국의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다.

정치학 박사인 허호준 한겨레신문 기자가 4·3과 미국의 관계에 대해 정면으로 질문을 던진 단행본을 냈다. '4·3, 미국에 묻다'(도서출판 선인)로 제주 사회에 길고 강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현재진행형 4·3의 퍼즐을 짜맞춰 가는 여정에서 묶였다. 제주4·3평화재단의 '2020년 학술연구지원사업'에 선정된 연구로 석·박사 학위 논문을 바탕으로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고 기존 자료를 다시 보면서 재해석한 결과물이다.

그는 일본 방위청 소장 문서를 통해 일본군이 제주도 건국준비위원회 등의 활동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제주도에서 미군과 일본군 사이에 체결된 영문과 일문 항복 문서도 발굴했다.

경비대의 초기 무장대에 대한 인식에도 주목했다. 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이 제주도인민유격대(무장대) 사령관 김달삼과 협상하기 위해 4월 하순 뿌린 전단에는 무장대를 '폭도'나 '반도' 가 아닌 '형제'라고 했고 '4·3무장봉기'를 '폭동'이나 '반란'이 아닌 '투쟁'이라고 불렀다. 그는 최소한 이 시점에서 경비대와 무장대 간 타협의 여지가 있었지만 미군정의 개입으로 파탄났다고 했다.

1948년 5월 5일 제주도에서 군정장관 딘 소장 등이 참석한 제주도 현지 회의에 대한 김익렬 연대장의 회고록을 뒷받침할 수 있는 자료도 발굴했다. 허 기자는 이 회의와 관련 딘 소장과 조병옥 경무부장이 '무차별 사살 명령'을 내렸다는 내용이 담긴 신문 기사를 찾아냈다. 1949년 1월 이승만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제주도 사태는 미 해군이 기항하여 호결과를 냈다"고 한 발언 이면에는 한국 정부 관계자들의 간절한 요청이 있었으며, 이를 받아들인 미해군 함정이 3시간 남짓 기항한 사실도 소개했다. 또한 미국 대통령 트루먼과 미 의회 지도자들이 제주도에서 일어난 학살 사건을 인지했으나 무관심했음을 보여주는 자료도 있었다.

그럼에도 아직 발굴되지 않은 자료들이 있다. 중앙 미군정청 특별감찰실의 3·1절 발포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 보고서, 평화협상에 대한 미군정의 대응 문서, 1948년 5월 5일 제주도 회의 문서, 계엄령과 초토화 관련 미국무부 또는 미군의 문서와 사진 등이다. 허 기자는 "밝혀져야 할 부분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는 말로 4·3 취재와 연구가 계속돼야 한다는 걸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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