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수의 난' 강우백 사적 생활 일부 확인

'이재수의 난' 강우백 사적 생활 일부 확인
서귀포 월평마을 소장 고문서 해제 담은 자료집 발간
1890년 강우백 관련 명문에 당시 제주 토지 거래 방식 담겨
호적중초보다 1년 앞선 1866년 대정현감 '보민절목'도 주목
  • 입력 : 2021. 03.14(일) 17:19
  • 진선희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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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 월평마을 고문서 자료집'에 실린 '이병구처 명문(李炳九處 明文)'. 강우백이 월평 출신 인사임을 알려주는 문서다.

1901년 '이재수의 난'의 세 장두 중 한명인 강우백(姜遇伯)의 사적 생활을 보여주는 문서가 발굴됐다. 최근 서귀포시월평마을도시재생현장지원센터가 펴낸 '서귀포 월평마을 고문서 자료집'에 담긴 명문(明文)이 그것이다.

이번 자료집은 월평마을 사람들이 집집마다 '궤'에 간직해온 오래된 고문서를 꺼낸 결과다. 한문 자료를 우리말로 번역하고 그 의미를 담았는데 총 55건의 소장 문서 중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은 29건을 선택해 수록했다. 시대별로는 ▷조선시대 말기(1866~1910년)의 절목(시행규칙), 명문(증명서), 전장기(인수인계서) 등 15건 ▷일제강점기(1910~1945년) 전장기, 물건기(공동체 관련 문서) 9건 ▷해방 이후(1947~1983년) 회의록, 마을지, 진정서 등 5건으로 나뉜다.

그중 1890년대 토지소유를 이전하는 명문류 가운데 강우백 관련 '이병구처(李炳九處) 명문' 한 점이 확인됐다. 해당 문서엔 1890년에 강우백이 마을 유력자인 이병구에게 빌려 쓴 돈을 갚지 못하자 보리쌀 4마지기의 밭을 대신 방매(放賣)해주는 내용이 적혔다. 다른 문헌에서 강오백(姜五百)으로 쓰던 이름이 이 시점에서 강우백으로 바뀐 것을 알 수 있고, 집근천모(아래아)루(執近川旨)라는 월평 마을 지명도 드러난다.

해제를 맡은 홍기표 전 성균관대 사학과 겸임교수는 "1901년 제주신축민란의 주모자 강우백의 사적 생활을 단편적이나마 파악할 수 있고, 월평 출신 인사임을 알려주는 문서로 영구보존되어야 할 사료"라며 "육지부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양전(量田)을 시행하지 못해 주변 사방의 밭으로 위치를 특정해주는 방식인 사표(四標)를 거래방식으로 사용한다는 점에서도 사료적 가치를 찾을 수 있다"고 했다.

호적중초보다 1년 앞선 1866년 작성된'보민절목(補民節目)' 일부. 한홍일 대정현감이 흉년을 맞아 구휼 기금을 마련하고 이를 각 마을별로 지급해 그 이자로 실정에 맞게 사업을 운영하도록 정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와 함께 이번 고문서 자료집에는 제주목사가 시행한 '호적지본전설치절목', '삼군구폐절목', '보민절목' 등 조선시대 말기 절목류 3건이 들어 있다. 이 중에서 호적중초보다 1년 앞선 1866년 작성된 '보민절목(補民節目)'은 대정현에서만 시행되는 규약으로, 현재 이 지역 다른 마을에서는 확인되지 못한 중요한 사료라고 했다. '보민절목'은 한홍일 대정현감이 흉년을 맞아 구휼 기금을 마련하고 이를 각 마을별로 지급해 그 이자로 실정에 맞게 사업을 운영하도록 정했다. 당시 대정 지역의 향리, 향청임원 6명의 직책과 성명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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