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영택의 한라칼럼] 바닷가에 솟은 지미봉에 올라 소금역사도 그리다

[문영택의 한라칼럼] 바닷가에 솟은 지미봉에 올라 소금역사도 그리다
  • 입력 : 2025. 06.03(화) 01:30
  • 오소범 기자 sobom@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한라일보] 지미봉에 오르면 우도 넘어 바다풍경과 한라산 자락 원근풍경이 한눈에 파노라마로 들어온다. 게다가 지미봉수와 종달연대, 패총과 논밭 등에 관한 다양한 역사문화도 떠오른다. 지미봉을 오르면 또한 제주 최대의 염전이 그려지고, 염전을 이곳에 터를 잡은 '강려'라는 인물도 떠오른다.

4면이 바다인데도 소금을 별로 생산하지 못한 곳이 제주도다. 본토보다 많이 내리는 빗물과 바닷가 용천수가 섞인 바닷물은 염분량이 적은 탓에, 소금 생산하기도 어려웠을 게다. 소금 끓이는데 필요한 무쇠 솥도 적었을 게고. 그럼에도 선인들은 '잇몸의 심정으로' 소금을 생산해 냈다. 관련 유적으로는 구엄리 돌염전이, 기록으로는 제주최대의 종달염전이 유명하다.

1519년 기묘사화로 제주에 유배 온 충암 김정이 지은 '제주풍토록'에는 커다란 바다로 둘러쳐진 섬에서 소금이 생산되지 않아, 진도나 해남 등지에서 매입해 온다 했다. 1601년 제주어사로 온 청음 김상헌이 남긴 '남사록'과 1910년 편찬된 '한국수산지'에는 1573년 제주목사 강려가 종달리 주민을 육지로 파견해 제염술을 익혀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1555년 '을묘왜변 제주대첩'에서 군관으로 쌓은 공훈으로 대정현감을 지낸 강려는 당시 지미봉에 올라 바닷가에 펼쳐진 사빈인 모래사장이 소금생산에 최적지임도 살폈을 것이다. 그 덕택에 종달리 선인들은 소금 가마니를 암소 등에 싣고, 도내 가가호호를 돌며 소금을 팔았다 해 '소금바치'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제주의 옛말 중 '종달리 암쇠 가름돌 듯한다'라는 표현은 이를 두고 한 말이리라. 다음의 민담은 기록되지 않은 역사에 대한 사료이기도 하다.

1416년 제주목·정의현·대정현 3읍체제로 개편될 때 종달리는 정의현의 끝 마을이었다. 하지만 언제인지 모르나, 종달리가 제주목의 끝 마을이 된 데에는 소금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한다. '제주토속적 옛말(2018, 진성기, 제주대학교박물관)'에 의하면 정의현 소속이던 종달리 선인들은 현감보다 한층 높은 벼슬인 목사가 다스리는 제주목에 속하길 원했다. 각 방으로 애썼지만 쉽게 뜻을 이루지 못한 종달리에서는 육지 밭보다 열 배나 더 많은 소득을 올리는 소금밭을 활용하기로 했다. 이를 공론에 붙인 마을에서는 소금생산에서 거둬드리는 수확을 세금으로 제주목에 충실히 바치겠다는 소장(訴狀)을 올려 소망을 이뤘다 한다. 이렇듯 잘 나가던 종달염전은 육지의 천일염이 대량으로 들어오면서 결국 자취를 감추고 대신 1957년 이후 간척사업을 통해 논밭으로 변해갔다. 벼농사를 짓던 논밭도 1990년 전후 갈대가 우거진 철새도래지로 변해 갔다.

지미봉에 오르면 오래전 섬이었던 지미봉 지역을 건너 오가던 선인들도, 해신당과 불턱 등의 해녀문화도 그려진다. 그만큼 무궁무진한 역사적 상상력을 키울 수 있는 곳이 지미봉이 아니던가. <문영택 (사)질토래비 이사장>



■기사제보
▷카카오톡 : '한라일보' 또는 '한라일보 뉴스'를 검색해 채널 추가
▷전화 : 064-750-2200 ▷문자 : 010-3337-2531 ▷이메일 : hl@ihalla.com
▶한라일보 유튜브 구독 바로가기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8146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